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역사 (문단 편집) == 쇠퇴 == 87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 특히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의 통치체계가 붕괴되면서 당나라와의 외교나 그에 관한 기록마저 사실상 단절되었기에, 14대 임금 [[대위해]]의 경우 오랜 기간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세기에 진위푸(金毓黻)의 발견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될 정도가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 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말갈]]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멸망하기 40여년 전인 9세기 후반에 발해가 신라와 인접한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말갈 세력이 거의 독립국처럼 신라와 외교를 시도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9세기 말에는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최치원]]이 897년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이 때 당나라가 신라 사신이 발해 사신보다 상석에 서도록 조치한 것을 신라 측에서 사례하기 위해 보낸 표이다. 한편 선왕 때 발해의 국력이 워낙 융성했기 때문이 상기한 사건이 선왕 때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사건들은 선왕 재위기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말엽에 있었던 일인데 공교롭게도 이 시점은 신라에서도 [[후삼국시대]]가 개막된 직후였고 당나라 역시 멸망하기 직전인 때였다. 발해는 신라와 당의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을 알고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0년대에는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가 이탈해 동북방 골암성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호족 [[윤선]]이 흑수말갈을 휘하로 끌어들여 [[태봉]]의 변방을 초략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경명왕]] 때인 921년 2월에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했고 이를 왕건 휘하의 장수 견권이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아무래도 이 때쯤이면 발해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무너진 듯 하다. 함경도 지역의 이 말갈족들은 이후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고려시대에도 고려에 저항하고 살다가 조선시대에 완전히 한반도로 편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