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유민 (문단 편집) ==== 부흥운동 본격화 ==== >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 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 >[[고려사]] 태조 17년(934년 7월) 가장 많은 발해인들이 귀화해온 단일 사례로는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광현]] 무리의 귀순이 있다. 일단 부흥운동을 전개하던 중 발생한 내부분열 때문에 귀순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으며, 이때 고려로 유입된 유민의 수는 수만 호로 추정된다.[* 수만 명으로 축소해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수만으로 축소할만한 근거는 딱히 없는 상황이다.] 덕분에 대광현은 고려 왕족에 준하는 대우와 영지까지 하사받았다. >겨울 12월 발해의 진림(陳林) 등 160인이 귀부(歸附)해 왔다. >---- >[[고려사]] 태조17년 (934년 12월) >이 해에 발해인 박승(朴昇)이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 >[[고려사]] 938년 12월 기사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