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데전쟁 (문단 편집) === 전통적인 역사관 : 반혁명 === Contre-révolution (Counter-Revolution) 당대 혁명 정부는 서부 농민들의 봉기를 조국과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왕당파와 보수적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 방데를 비롯한 서부일대는 지금도 보수성과 가톨릭 신앙이 강한 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혁명 공화국 정부가 했었던 짓을 보면 당연한 모습일 수 있다. 다만 2015년 지방선거 때는 이민자, 난민 문제와 [[파리 테러]]의 영향으로 우경화가 드러나는 결과가 예상 되면서도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극우인 국민전선이 이 지역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걸 보면(특히 1차 투표에선 국민전선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중도 보수성향이지 극우 수준까지는 아닌 듯.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2412|1차 투표결과]]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3913677|2차 투표결과]]] 프랑스 혁명 정부의 최대 목표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강화였기에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이 혁명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농민쨩은 그러지 않아-- 때문에 쥘 미슐레(Jules Michelet)[* 웃긴 건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프랑스 혁명 때랑 시대는 다르지만 어쨌든 당신이 싫어하는 왕정한테 도움을 준 사람인데요? 아하 그래서 혁명 당시 공화파가 기념물들을 훼손하고 탄압하기는 했지~~]를 비롯한 당대 역사학자들은 순진한 서부의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만과 음모에 놀아나 구체제 타파를 추구한 혁명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의 규모를 1793년 3월 발생해 그 해 12월에 끝난 작은 내전으로 축소시켰는데 이는 초기 방데의 봉기만을 강조함으로써 1794년 이후 공화국 군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학살 등의 보복행위를 은폐시켰다. 이런 국가 주도의 공식적인 기억, 즉 혁명에 거역한 방데라는 국가기억의 형성은 방데 전쟁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방해했다. 국가기억 속의 방데전쟁에서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지와 광신,[* 이건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고 방데인들의 외모와 풍습을 특정화해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거의 [[인종차별]]이나 마찬가지. 같은 자국인 백인에게도 이런 식이니 식민지의 다른 인종인 민중들은 어떻게 취급했을지는...]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강조되었다.19세기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은 체계화된 공교육 제도를 이용해 방데를 반혁명이라고 공식화시켰고 봉건적 질서와 절대 왕정을 혁파한 혁명에 대한 저항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방데란 용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공화국의 적, 망명귀족, 왕당파, 반란' 등의 용어로 이해되었는데 방데라는 단어가 반혁명과 반란의 이미지를 담게 되면서 자연히 방데는 반혁명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방데 주민들은 반혁명주의자들의 후손'''이 되었다. [* 어느 정도냐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랑빌 주민들이 방데인들을 시체로 만들어 그랑빌을 사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다. 이 속에는 단순히 지역 사수에 대한 기쁨이 아닌 반혁명 세력을 몰아냈다는 자부심도 담겨있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 시대 [[홍경래의 난]] 때나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의 공격을 격퇴한 지역이 21세기까지 농민군을 죽인 걸 자랑하는 격. 사실 이런 사례는 별로 존재하지 않고 엄밀히 말하면 해방 이후와 [[6.25 전쟁]] 당시 이념 갈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인 사례가 더 적합하겠지만.][* 물론 이런 낙인 속에서도 성공해서 주류에 편입한 방데 출신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를 지냈던 [[조르주 클레망소]]인데, 이 사람이 정치권에서 활동했음에도 방데 사람들의 억울한 낙인은 지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클레망소의 집안은 혁명을 지지하는 공화파 집안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무의미한 경우였다. 결국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승리해서 전국적으로 축하 행사를 벌였는데 방데 지방은 축하 행사를 거절하고 방데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거행했다.] 낙인 속에서 방데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파괴는 무시되었다. 방데 전쟁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주민들은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도 방데 전쟁의 발발이 반혁명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방데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에 따른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주장했으나 19세기 동안에 이러한 민간기억의 움직임은 미약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방데의 사례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국민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동체로 부각되면 이와 상충하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망각되도록 강제되는데 방데전쟁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예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