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재학당 (문단 편집) == 역사 ==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2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Scranton,W.B)[*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하러 [[조선]]에 왔다.]의 집 1채를 산 다음 방 2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2명의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부인도 초기에는 좀처럼 학생을 모으지 못해, 학교 일을 하던 일꾼 김씨의 딸을 학생으로 삼기도 했다. 그 학생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의사]]인 [[박에스더]].] 1기 입학생은 이 2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이후 [[고종 황제]]가 직접 내린 이름으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초기 학생들은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학교에 등록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마태복음]] 20장을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1895년 배재학당 내에 보통부, 중등부,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대학부가 대학 기관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학부는 자체적으로 설치한 학기 과정일 뿐 당시 조선에 대학 기관은 없었다. 이와 비슷한 [[이화학당]]도 그렇고 자체적으로 보통부, 중등부(고등보통부), 대학부를 설치했을 뿐이지 이와 같은 교육기관을 대체했던 것이 아니다. 차이점이라면 대학부를 졸업하면 보통부나 중등부의 교사를 할 수 있었던 것뿐이지, 대학의 학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대학에 들어가거나 추천서를 가지고 1~2학년으로 편입해야 했다.[* 학기 과정만 봐도 현재의 중등교육기관(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체하기엔 매우 짧은 과정이었다. 당시도 그렇고 해방 이전까지 조선에서 학사를 수여하는 곳은 [[경성제국대학]] 하나뿐이었다. 그외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교육기관들은 정식 과정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조선인의 반발로 [[전문학교]]급 대우를 받게된 것이다([[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 그래서 당시 조선 출신 지식인들을 보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학에 편입하거나 입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초기 시작은 국한문학과, 영문학과, 신학과로 시작하였지만 이후 의학원[* 의학과정을 배우는 곳이지만 당시 조선에는 대학 기관이 없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면 대학시설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별도로 일본의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야만 했다.]을 신설하고 [[사범학교]][* 당시 사범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가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도 신설했다. 참고로 지금의 [[배재대학교]]는 배재학당 대학부를 직계승한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의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이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부 위탁 교육생들을 교육하며 안정화됐고, 중등부나 고등보통부가 분리되어 교육기관으로 인가되면서 배재중학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배재중학교와는 다르다.], 배재고등보통학교 등으로 개편해 가면서 제도권 교육의 한축을 이루었다. 당시 서구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보니 [[일제강점기]] 반일 투쟁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다. 배재중고등학교 연혁에서는, 이걸 일제가 배재학당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이리저리 뒤흔든 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졸업생 중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도 있다. [[광복]] 이후, 배재학당은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지만 배재학당 대학부는 폐지되었다. 본래는 [[한국전쟁]] 후 1959년에 동문이기도 한 당시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불하받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의 땅에 정규 대학으로 재설립을 추진, 기공식을 마치고 건축물까지 착공하였으나 정권이 바뀐 후 토지 불하 과정이 위법했다는 이유로 월곡동 부지를 다시 몰수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배재학당 대학부는 부활하지 못한 채 한동안 명맥이 끊기고 만다. 1970년대 들어서야 경영난에 처한 대전보육학원을 인수해 [[대전시]]에 있던 보육초급대학을 4년제로 승격시켜 [[배재대학교]]를 설립하면서 대학 부활 숙원 사업은 이루어졌다. 대신 보육초급대학의 위상이 배재학당에 비해 많이 낮았고 과거의 배재학당 대학부에 있는 학과가 보육초급대학에는 없는 경우도 많았기에 애초 배재학당의 목표에 비해 실제 대학 부활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다. 재단인수합병이 약점이 되어 배재대학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나마 마크라도 같은 마크를 쓰고 공식 설립 시기가 1885년으로 나오는 배재대는 그나마 양반. 배화학당에서 비롯된 [[배화여자중학교]]ㆍ[[배화여자고등학교]]와 [[배화여자대학교]]의 경우, 배화학당은 배재학당과 같은 중등교육기관이었지만 대학부를 설치했던 역사는 없었기 때문에 배화여대의 설립 시기는 1970년대로 나온다. 마크도 다르다. 재단도 같은데[* 반면 같은 감리회 계열의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1886년에 세운 [[이화학당]]은 일제강점기이던 1943년에 이미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재단(이화학원)과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이화학당)을 분리하여, 이화여고보는 중구 정동, 이화여전은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각자의 길을 갔다. 때문에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현재 각각 [age(1886-01-01)]년의 역사를 내세운다. 즉, 중ㆍ고등부와 대학부가 하나이던 공통의 설립 초기 시기를 각자가 모두 자기네 역사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거에 비하면 배재대는 취급이 양반인 셈.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만큼 [[한국근현대사]]의 ~~여러가지 의미로~~ 굵직한 사건에 관여한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연세대학교]]에서 한국 최초라고 주장하는데, 그 한국 최초라고 주장하는 연도가 배재학당보다 1년이 늦다. 근데 뭐,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랑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차피 같은 팀이었고 절친이었다.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를 기리기 위한 [[연세대학교/신촌캠퍼스#s-2.1|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이 있기도 하다. 연세대학교에서 밝히는 설립연도는 1885년은 [[제중원]]의 설립연도이고,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학교의 설립 연도는 훨씬 후대이다. 그러나 조선기독교학교는 [[감리회]]와 [[장로회]]의 대표 학교인 배재학당과 [[경신학교]]의 대학부를 따로 분리해 세웠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2270&ganada=&pageUnit=1|.]]~~어차피 그렇게 주장해도 배재학당, [[경신학교]] 둘 다 [[가톨릭대학교]]의 설립년도 '''1855년'''보다 30년가량 뒤진다.~~ ~~뭐 사실 [[성균관대학교|최종보스]]는 따로 있다~~~~ [[배재고등학교]] 정문을 올라가면 아펜젤러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의 손가락을 3번 만지면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아펜젤러 동상을 감싸고 있는 방패 모양 풀밭에 들어가면 [[삼수]]를 하게 된다는 전설도 있는 걸 보면, 진실은... 문서를 쭉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여러 사학들 중에서도 문화 정체성이 대단히 선명한 편이고, 때로는 조금 배타적이고 막무가내인 모습까지도 종종 보인다. 대체로 지역 내에서는 선배 출신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앞으로 끌고 가려는 분위기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고, 근처에 [[명성교회]]가 있어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라 그런지 다수의 학생들이 배재 특유의 [[미션스쿨]] 문화를 곧잘 체화한다. 때문에 사회 전반에서 학교 선후배 문화가 굉장히 약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단결력이 강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