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곰 (문단 편집) === 예산도 적고, 정보는 부족하고 === 백곰 미사일은 1970년대 중, 후반에 실제로 발사시험에 성공하는 등, 상당한 사업진척을 보였다. 물론 말은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겪은 설움과 고난은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 [[번개사업]] 문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한국의 방위산업 기술력은 [[대전차로켓]]의 [[역설계]]도 간신히 해낸 수준인데[* 중장거리 야포만 해도, 포신은 통일중공업, 포를 받치는 이동형 거치대 및 포다리 등은 대우중공업에서 맡아, [[https://news.v.daum.net/v/20210406140610887|155mm 견인포를 개발]]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범발사를 하는 데, 포탄은 그럭저럭 발사돼 사거리까지 날아갔지만, 지탱하는 포다리가 끊어지는 사고가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들 대통령 얼굴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데, 다행히 박 대통령은 그냥 웃음만 짓고 갔으며, 이후에도 별 탈없이 넘어갔다는 후문.] 이걸로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구상회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정보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외의 [[국방무관|주재무관]]들을 통해서 미사일 관련 정보를 구해달라고 군부에게 부탁했는데, 무관들도 미사일 전문가는 아닌지라 그나마 보내준게 현지 언론에 실린 미사일 관련 기사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연구원들은 그 성의라도 어디냐면서 고마워했다고. 한동안은 미국도 한국에서 백곰 사업을 진행 중인 줄 몰랐는데, 생김새가 사실상 나이키와 동일하고, 또 사업 자체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나면 연구원들은 엄중한 보안 교육을 받은 뒤 보안사령부에서 마련해준 안전가옥에서 숙식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연구원들의 가족들을 고급 식당에 초청해놓고 직접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이 '지금 연구원들은 국가의 극비 사안을 위해 해외로 출장가니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라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미 정부도 백곰 사업을 눈치챘으며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로 치자면 중국에 [[휴대폰]] 수출했더니 그거 그대로 카피해서 국산화하겠다는 꼴이었기 때문. 또한 당시 미국 정권은 여전히 한국의 장거리 미사일 보유를 반대하던 지미 카터 정권. 거기다가 미국은 당시 기술로는 100km가 넘어가면 공산오차가 100m 이상이나 되는데, 이를 화학탄 또는 '''핵'''으로 커버하려는 것 아니냐며, 안보담당 차관보였던 아브라모비츠까지 국과연에 달려와 개발 중지를 요구했으며, 미 8군 사령관이[* 이름을 워커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름이 비슷한 [[존 위컴]]을 워커로 오인하였거나, 대구의 캠프 워커 비행장과 관련해 기억에 착오가 온 듯 하다] 연구실로 달려와 행패를 부리자, 총책임자였던 이경서 박사와[*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멱살을 잡으며 실랑이를[* 주한미군 사령관이 이 박사에게 "당신 기억해두겠다"(=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이 가도록 하겠다)고 위협조의 말을 남기자, 이 박사가 "당신이 우리 연구소에서 이렇게 행패를 부린 일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이 만들어봐야 명중률 낮고 발사조차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대놓고 공개적으로 발사까지 성공을 해서 높은 명중률을 보였으니 미국으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당시 ICBM과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었던 한국이었으니 당연했다. 1977년에 이 문제가 대두되었고, 우리정부는 어디까지나 나이키 미사일의 개량이 목적이며, 미국이 나이키 미사일을 폐기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대체하는 것을 알기에 나이키 마사일의 정비 유지와 성능개량을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설득해 사거리 180km, 탄두중량 1000파운드로 제한하는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1979년에 체결하였다. 어차피 백곰으로 날릴 수 있는 최대사거리가 그 정도였고, 또 그 이상가는 사거리를 만든다는게 당장 쉽지 않았다.[* 사실 시스템만 고치면 180km -> 300km로 사거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더글라스社와 합의를 해야 고칠 수 있다고][* 흔히 이 미사일 사거리 지침의 체결을 아래에 언급할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알고 있으나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한편 이 미사일 사업을 진행하려면 '''"연구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다고 치더라도, '''"실제 제품은 기업에서"''' 만들어야 했는데, 기업들이 이렇게 실패 위험이 높고 수익도 별로 안나는 군수사업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다. 군수산업이 돈 많이 번다고 소문난 것은 주로 영화나 소설등의 영향으로, 장비 하나하나의 군 납품가격은 비싸지만 대부분 원자재와 인건비 자체가 비싸다. 또 납품되는 수량자체도 적기에 전체 판매수익을 따져보면 보통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이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취급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반 강제로 미사일을 제작할 업체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현재의 [[LIG넥스원]]의 전신격인 금성정밀이다. 2016년 5월에 당시 개발진들이 출간한 회고록을 보면, 워낙 가진 게 없다 보니 [[경운기]] 제작 회사에서 외부 동체를 만들고 로켓 연소실에 쓸 고강도 강철이 없어서 '''[[청계천]]에서 155mm 야포 포신을 구해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청계천에서 뭘 구했다고?!--[*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 비화에서도 볼 수 있듯, 전쟁을 치른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런 무기류나 그 몸체를 구하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2010년대까지 전쟁을 치른 이라크에서는 결혼식 하객으로 간 신랑 친구들이 '''"실탄으로"''' 축하 예포를 쏴주는 우정(?)을 과시한 사례도 있다.][* 국내에서 처음 M1 소총을 복제했을때도 부품과 재료, 시간이 부족하자 고물상에서 총기나 군수품을 주워와서(...)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