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곰 (문단 편집) === 개발 성공과 그 이후의 곡절 === 미사일 협정을 맺은 후 미사일 개발 계획은 탄력을 받았다. 먼저 [[국방과학연구소|한국 연구원들]]은 레드스톤 미 육군 미사일연구소로 데려가 연수를 받았다.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받았으며, 가용한 예산[* 총책임자였던 이 박사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예산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공동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더글라스社측 협상자로 나온 미국인이(이 박사의 동기) 공동연구개발비로 3,000만$을 요구한 걸 거절하고, '''"우리 연구진들이 그쪽 연구진들과 상호 검토하는 선"'''으로 200만$로 가격을 낮췄고, 다시 "동기 디스카운트"를 요구해 150만$ -> 100만$까지 가격을 낮췄다고.] 일부로 폐업을 앞둔 미국측 LPC 고체 추진제 제조공장 설비도 인수하였다. 이 제조공장은 나이키 미사일의 주 고객이었던 [[맥도넬 더글라스]]사 지분이 많은 곳이었는데,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우리 기술진들이 접근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고 한다. 당시 기술 이전의 초기단계는 정식 과정을 밟았지만, 그 이후의 단계부터는 차근차근 제대로 기술을 전수받는다기 보다, '''"상호 검토"''' 명분으로 "[[바란(북두의 권)|보고 최대한 배우라]]"는 것에 가까웠는데, 자금 수혈이 필요한 더글러스사 덕분에 우리 기술진들이 보고 습득한 기술 범위가 넓고 효과적이었다는 후문. 무엇보다 "상호 검토" 명분 때문에, 종이나 기타 필기도구 일체를 반입 못 시키게 하는 와중에, 이 박사가 6사람만 데리고 들어가 '''"오직 머릿 속에 기계류, 금속류 관련지식을 담아"'''온 열정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연료 문제가 남아 다들 애를 먹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대덕 연구소가 설립되어 '''"초창기"'''에는 이 미사일 연료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미사일에 들어가는 주요 전자 부품과 소량 생산되는 일부 추진제 원료는 미국에서 수입했다.[[https://m.mk.co.kr/news/culture/view-amp/2015/02/124584/|참고 기사(매일경제신문)]] 1978년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M8XNMxNCfks|#]] 이렇게 1979년에 미사일 사거리 지침 등으로 미국과의 문제도 해결되고, 용접팀이 쓰던 검토 시약통이 폭발하는[* 붉은 시약을 뿌려 말린 후 하얀 시약을 뿌리면, 붉은 시약이 거품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이 스프레이를 수거해 소각하는 데, 덜 쓴 스프레이를 직원들이(용접팀 5사람 中 3사람은 그냥 일반 공직자분들이었다고 한다) 가져가 소각하는 바람에 소각장에서 폭발하고 만 것] 바람에 인근 경찰서장이 쫓아오는 해프닝[* 사고(?) 다음날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금일봉을 하사했다고 한다. 다들 '상부에 보고가 예쁘게 들어간 덕에 오히려 격려차 오시지 않았겠느냐' 추정했다고. 하지만, [[논공행상|개발 성공 포상]]에서는 이 팀의 공직자들이, 고생한 것에 상응하는 처우를 못 받았다는 후문.] 등 갖가지 에피소드를 남기고 몇 차례의 발사시험도 성공하는 등(물론 개발과정에서 실패도 몇 번 있었다) 사업이 진척되어 갔으나, [[10.26 사건|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사업의 진척속도가 늦어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전두환]] 정권 출범 후 백곰 사업이 취소되는 악재가 생긴다. 단순히 사업만 취소시킨 것이 아니라 국방과학연구소 내의 미사일 관련 연구자들도 대거 자리에서 물러난 것. 결국 백곰 사업이 취소됨에 따라 이것의 후속 사업으로 준비하던 각종 미사일 사업도 줄줄히 취소되었다. 국내에 어렵게나마 모이기 시작한 미사일 연구개발 인력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우리나라의 미사일 개발 능력은 후퇴해버리고 만다. 나중에 '''민간 기업에 시설과 인력을 이전 시킨 일본'''의 사례를 알게 된 관계자들이 아쉬워했지만[* 민간에 기술을 이전하면, 그간 축적한 기술을 보존-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 이미 해체된 부서와 사람들까지 원상복귀하기엔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거 사실은 [[나이키 미사일|나이키 허큘리스]]인데 색만 바꿔 칠해 내놓은 것이냐?'며 사업을 취소시켰다는 '''"카더라"'''가 있으나, 실제로는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군 현직으로 머물던 시절에는 직접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들을 만나서 백곰사업에 대해 칭찬도 하고 그랬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백곰이 나이키 허큘리스 커스텀 도장버전이라고 생각했다기 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하여[* 미국측은 일단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조건으로 백곰 사업진행을 허가하였지만 좋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사업을 취소시킨 것이라 보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몇 년 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장관급 국무위원 16명[* 다른 한 분은 당시 사진 기자로 명성이 있었던 이중현 씨(동아일보).]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모든 걸 지켜본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을 위협할만한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이 없음을 알고 통탄했던 것. 이에 5공 출범 후 취소됐던 백곰 사업의 후속 계획 일부를 재추진, [[현무 미사일|현무 지대지 미사일]]이 탄생하게 된다. 현무-1이 나이키 허큘리스와 닮은 것도 이 때문. 윗 글에서 백곰 사업이 전두환 정권 출범 후 취소되었다고 하는 부분은 정확하지 않다. ADD 구상회 박사 회고록[* [[http://scieng.net/tech/3697|한국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고록 [1\]]][[http://scieng.net/tech/3698|한국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고록 [2\]]]]에 의하면 백곰 미사일 개발지시는 비공식적으로는 1971년 12월 27일 1차 번개사업 사격 시험이 끝난 후였고 국방부 정식 공문으로는 1972년 4월 14일에 내려졌다. 당시 보안을 위해서 항공공업 육성계획이라는 가명으로 진행되었고 원 계획은 76년까지 개발완료였으며 시험발사 성공은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 안흥종합시험장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 때 백곰 후속사업이었던 K2, K3 및 K5 유도탄 개발계획이 취소된 건 맞지만 백곰사업은 이미 완료됐기 때문에 취소당한게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