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두산함 (문단 편집) == 전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백두산함 03.png|width=100%]]}}}|| || {{{-1 대한해협 전투 한 달 전인 1950년 5월 20일 진해 제2부두에서 찍은 백두산함 승조원 기념 사진.}}} || [[1950년]] [[6월 25일]] 밤 9시경 부산 앞바다를 통해 침투하려는 [[북한 해군]] [[해군 육전대|육전대]] 600명을 태운 무장 수송선을 포격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를 '''[[대한해협 해전]]'''이라고 칭한다. 참전용사들의 경험담을 참고하면 북한군 무장선박이 워낙 크고 단단해 백두산함의 3인치 포로는 대충 쐈다간 탄약을 모두 소모해도 격침시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약점(바이탈 파트)를 정확히 노려 사격할 목적으로 피해를 무릅쓰고 지근거리(약 400미터)까지 배를 갖다 붙였다고 한다. 이에 북한 수송선은 백두산함에 도선하기 위해 상륙정에 육전대를 태워 띄워보내기 시작했고, 상륙정을 막기 위해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직접 총을 들고 갑판까지 나와 응전해야 했다. [[소해정]]인 YMS-512 구월산정과 YMS-518 고성정이 달려와 37mm [[대전차포]]를 쏘고[* 육상에서 사용하던 미국제 대전차포를 함정에 올린 것이다.] 적함 마스트가 꺾이는 가운데 백두산함의 3인치 포의 고무 스프링이 녹아 고장났다. 화포를 사격하는 과정에서 과열이 되어서 생긴 고장이고, 예비 부품으로 교체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으며 이미 예비 부품도 있었다. 그런데 이 대처를 빨리 못한 이유가 좀 서글프다. 앞서 말했듯이 포탄이 너무 부족해서 실탄 사격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이런 고장을 접해보지 못해 원인을 빨리 알아챌 수 없었던 것. 이를 알아챈 적함이 아군에게 역공을 가해 백두산함 조타실을 뚫고 자이로 컴퍼스를 때려 아군 2명이 죽고 또 한 발이 백두산함 주포 옆을 때려 백두산함에 손상이 갔다. 그래도 접근한 보람이 있었는지 오전 1시 38분 대한민국 해군은 결국 적함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에서 벌인 성과는 보통 큰 게 아니다. 만약에 이 북한군 함선을 막지 못했더라면 부산에 침투하여 항만 시설을 파괴하고 이를 장기간 점령, UN군의 부산항을 통한 물자 양륙을 지연시켜 [[김일성]]이 큰소리치던 8.15까지 남한을 모두 차지하는 계획이 정말 이뤄졌을지도 모를 상황이었기에 대단히 큰 활약을 한 셈이다. 일부 경상도 지역에 공비가 침투해 후방 전선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 해상 침투는 몇 건 더 있었으리라 추정되나, 부산항에 직접 침투했을 이들을 격퇴한 것은 나머지를 놓친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승리임에 분명하다.[* 남북 모두 해군 전력이 빈약하여, 양측 모두 전 해상을 감시하기란 불가능했다.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 해군 수송선을 발견한 그 자체가 기적이자 전과라 할 만한 것이다.] 또한, 이는 [[춘천-홍천 전투]]와 더불어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간 진격을 중지케 해 시간을 벌게 해준 전투로 언급된다.[* 소련 측의 자료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한해협 해전]]을 참조.] 그 뒤에도 여수철수작전에서 한국군과 대전에서 후퇴한 미 육군 제24사단 패잔병 2300명을 수습하고 덕적도-영흥도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1951년 2월 10일에 있던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도 꾸준히 활약을 했다. 상륙작전 당시 포격만 한 것이 아니라 징발한 민간 화물선([[전차상륙함|LST]] 문산호) 선원 20명이 상륙부대에서 활약했다. 애초에 상륙 전체 인원이 200명도 안되었기에 쉽게 성공하여 인천을 탈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