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인엽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형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백선엽]]이다. 약송소학교와 [[숭실중고등학교|숭실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육군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일본제국 육군 항공소위로 종전을 맞았다. [[8.15 광복]]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로 귀향하여, [[평양]]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경호대장으로 근무했다(백선엽은 조만식 비서). 그러나 [[소군정]]에 의해 조만식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이어 감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역시 비서로 근무했던 형 [[백선엽]][* 조만식의 비서가 백선엽 한 명이었던 것은 아니고, 조만식의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유명한 [[선우진]] 역시 유일한 비서인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여러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 [[선우진]]이다. 당장 소설가 김훈 부친도 비서로서 활동한 전례가 있다. 백범 암살 전후의 정황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증언했고,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의 차남 [[김신]]과 함께 동행한 유이한 인물이기에 그런 오해가 있다.]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직후인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육군 장교로 임관한다. 창군 초기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되어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쾌속 승진을 한다.[* 다만 건군초기 국군 이전 군 경력이 고작 위관급이었던 인물들이, 국군에선 쾌속 승진을 했다. 딱히 백인엽이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례로 [[김신]] 장군은 38세에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는데, 당시로선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30대 장군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그러나 [[곽영주]]같은 일을 생각하면....] 6.25때 서울에서 결사항전한다는 허위 방송을 켜놓고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지에서 무너진 병력을 수습했고, 그 병력이 사열한 모습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백인엽에게 "형도 군인인가?"라고 물어 볼 정도로, 대통령은 백인엽을 먼저 알고 이후에야 백선엽을 알게 되었다. 백선엽은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용감 무쌍하게 싸우고, 국군 최초로 평양 입성 작전에 성공하였으며, 북한에서 부터 유일하게 건제 유지하며 후퇴하며 계속 공을 쌓았지만, 제1군단장에 부임하여 진급 신고식을 할 때서야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다. 이때 이승만이 한 말은 "자네가 백인엽이 형인가, 아우인가?"였다. 아무래도 백선엽은 일선부대와 육군본부를 오가던 '흔한 젊은 장교 1' 정도의 이미지였고, 백인엽은 이승만의 바로 곁에서 경호를 서던 인물이었으니. 백선엽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하야하는 순간까지 백인엽을 찾았다. "백선엽 장군 형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야?"하면서 이들이 군을 이끌고 왜 사태를 정리하지 않냐며 찾은 것이다.[* 당시 백선엽은 4성장군이고, 백인엽은 3성장군이었다. 특히 백인엽은 4.19 직전까지 포천에 주둔한 6군단장으로 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할 위치에 있었다.] 앞선 주석의 설명처럼 [[건군기]]의 빠른 진급 탓에 194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6.25 전쟁 직전에 그가 근무한 곳은 당시 [[38선]]으로 고립된 최전방인 [[옹진반도]]였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17연대장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1훈련소장, 제6보병사단장 등을 지내고 1952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9보병사단장, 제2훈련소장 등을 지낸 뒤 1955년 9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1군단장과 제6군단장을 지냈으며,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예편했다. 이후에 선인재단을 세웠다.[* 형 백선엽과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만든 재단이다.] 그러나 재단을 통한 온갖 비리로 허구헌날 구속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정권이 새로 바뀔 때마다 늘 비리 척결이라며 잡혀간다"라고 자조적으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형 백선엽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칭송하던 [[월간조선]]조차도 백인엽의 선인재단 운영 및 비리를 수 차례에 걸쳐 고발할 지경이었다. 2013년 12월 14일에 90세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