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어 (문단 편집) === 시대별 변천 === 신라의 [[수도(행정구역)|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위례성]])⇒한홀([[한성]])⇒고마나루([[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시]])⇒소부리([[사비]], 현재의 [[충남]] [[부여군]])’와 같이 천도를 두 차례나 하였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보면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고구려어의 영향이 다소 강했던 언어였을 개연성이 높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였다. 이후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남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을 개연성은 현재로선 없다고 봐야 한다. 한성백제의 양대 지배층 중 하나는 경기충청전라 서해안을 주름잡은 토돈분구묘제 세력이기 때문. 고조선 직계인 경기·충청·전라 내륙은 굳이 따지면 경기·충청·전라 동부이므로 남북으로 갈라져 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한성백제의 주지배층인 고구려인들은 적어도 고조선이 전국연에게 크게 패해서 요동을 잃기 전에는 고조선의 일부였던 집단의 직계 후신이기에[* 부여인들이 지배층으로 오기 전이지만 피지배층인 적석묘계 집단이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성백제의 언어가 과연 초반부터 마한 주류 세력인 경기·충청·전라 동부 및 서부와 언어가 그렇게 달랐을지는 영 미지수다. 한편 마지막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로 옮긴 도읍지인 [[공주]] 시대로부터 그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고구려]]계 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백제어는 초반에는 [[마한]] 주류 집단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옛 마한 연맹 소국들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재하는 후기에 이르면 당시 충청·호남 내륙 지역에서 주로 쓰이던 언어들까지 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이후엔 결국 단일 언어사회에 다시 가깝게 되었다고 본다. 다만 백제 후기인 [[성왕]] 대에 백제의 국호가 '백제'에서 '남부여'로 잠깐 바뀌었으나, 남부여라는 국호 자체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이는 백제가 그 시초부터 고구려계 귀족들로만 건국한 국가가 아니었던데다 다른 옛 마한계열 귀족들이 백제는 몰라도 남부여란 정체성에는 회의적이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백제어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쓰는 언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적은 편이다. 풍납토성을 건립할 단계부터 아예 지배층이 이원적이었고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배층의 언어가 고구려계 언어로만 구성될 수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