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종원 (문단 편집) == 생애 == [[1966년]]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집안의 [[장손|종손]]으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자라다가 [[중학교]] 시절 상경해 [[서울고등학교]][* 당시 [[시나위(밴드)|시나위]] 멤버 [[신대철]]과 동창이었다고 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백종원의 골목식당/공릉동 기찻길 골목|공릉동 기찻길 골목]] 편에 나와 신대철이 기타를 가르쳐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귀찮아 배우는 것을 포기했고 현재는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엔 잠시 [[서울특별시]] 장한평에 위치한 [[중고차]] 시장에서 자동차 중개업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9년]], [[KBS]]의 토크쇼 프로그램인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여 어렸을 적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만석꾼이었던 증조할아버지 백영기(白榮基)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인지 어렸을 때부터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9살 때에는 산에 놀러갔다가 본 버섯 농장에서 별다른 투자도 안 한 거 같은데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꿈을 버섯 농사로 정한 적도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때는 캔이 아닌 병에 음료가 나올 시절에 음료수 병을 보고 '저게 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 학교 리어카를 빌려 오락 시간과 보물찾기 같은 시간을 다 건너뛰고 리어카 6개 분량의 공병을 모아서 고물상에 갖다 팔아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리고 5학년 1학기까지 이렇게 돈을 벌었고, 방위성금으로 다 냈다고 한다. 5학년 2학기부터는 공병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서 할 수가 없었다고.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친구의 형이 중고차 장사를 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호객행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호객행위가 너무 단순했으며, 막상 이렇게 손님을 불러와도 안에서 딜러들이 설명을 너무 못하고, 손님이 어떤 차를 원하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본인이 직접 알려줘도 딴소리를 하면서 손님을 놓치는게 답답한 나머지 직접 딜러를 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딜러로 일하기 시작한지 40분 만에 차를 파는 데 성공하고 며칠 만에 차를 6대나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2번째로 차를 사간 손님이 미터기 조작과 사고 경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모르고 팔았던 백종원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고 한다.[* 다른 중고차 가게에서 매물을 얻어와 거기서 들은 정보를 그대로 믿고 팔았다고 한다.]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자동차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거기까지는 의욕이 없어서 더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사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빨리 그만둔 이유는 다른 구매자들도 따지러 올까봐 그랬다고 한다. 그래도, 백종원이 자동차를 좋아하고 장사수완을 익히는 계기가 된 것은 이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 모양이다. 처음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요식업에 뛰어든 것은 대학생 때로, [[연세대학교]] 1학년 때[* 신입생 당시 응원단장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 당시에는 응원부가 없었고, 다음으로 찾은 보디빌더부도 없어서 역도부에 들어갔는데, 신입생 환영식이 구조대원이 훈련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의 식겁할 만한 것들이라서 결국 1주일 만에 탈퇴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 삼아 일한 압구정동 [[호프집]]을 1달 만에 인수[* [[백종원의 푸드트럭]] [[백종원의 푸드트럭/사직구장 푸드트럭존|부산 편]]에서 스테이크 트럭을 솔루션 하는 과정에서 백 대표가 이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치킨집이라고 언급했는데 <대화의 희열>에 출연해서 말하길 정확하게는 치킨을 파는 호프집이었다고 한다.]하면서 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는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이때 상권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주변에 치킨 가게가 없으니 배달이나 포장 판매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주인 할머니에게 권유를 했지만 할머니는 썩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고, 이를 설득해서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면서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은 끝에 핸드메이드 전단지를 만든다. 그런데 전단지를 돌리고 싶었는데, 당시 아파트의 경비가 삼엄해서 경비에게 치킨을 돌리면서 전단지를 돌릴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아파트에 전단지를 돌렸고 돌아오자마자 전화가 많이 와서 이때 장사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이때는 이렇게 반응이 빠를 줄 몰라서 준비가 아직 안 된 상황이라 곧바로 배달을 시작하지는 못했다고. 그러다 얼마 안 가서 일이 너무 많아지니 치킨 튀기는 기계도 5대까지 늘렸지만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게가 잘되니 힘들다는 이유로 가게를 내놓기로 결정했고, 이걸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가게를 직접 하지 않겠냐"고 할머니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근데 통장에 돈이 그렇게 많이 없어서 "돈이 어딨어서 가게를 인수하냐"니까 할머니가 "지금 가진 것 만이라도 가져오면 내주겠다, 너는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가게를 백종원에게 넘긴다. 그렇게 잔금을 모두 갚으면서 가게를 완전히 인수하고, 이후 3년간 가게 3개를 운영하며 15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으나, 백종원이 [[나이트 클럽]]을 인수하려던 것을 알게 된 가족이 기겁을 하고 결사반대[* 백종원의 할아버지는 예산경찰서장을 역임하고 예덕학원재단을 창립한 백창현이며, 그의 아버지는 충청남도 교육감을 역임한 백승탁이다. 이런 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뼈대있는' 집안의 장손이 지역 조폭들과 엮이며 주취자들을 상대하는 게 불가피한 밤무대 물장사를 한다니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다.] 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육군]] [[학사장교]]로 지원하게 하였다고 한다.[* 출처 [[1996년]] [[9월 6일]], [[매일경제신문]].] 어머니는 첫 면회 때 "그간 행적을 모두 알고 있으니 허튼 생각 말고 군 복무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고. 결국 나이트 클럽은 인수하지 못했고, 입대 후 가지고 있던 호프집은 염가에 처분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0600099131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6-09-06&officeId=00009&pageNo=31&printNo=9544&publishType=00010|#]] [[1989년]] 가족에게 쫓기듯 육군 학사 14기로 들어가 육군 [[포병]] [[소위]][* 인터넷 등에 공개되어 있는 육군 장교 [[정복(의복)|정복]] 차림의 사진엔 [[보병]] 병과휘장과 공수윙을 달고 있는데, 다른 이의 정복을 빌려 입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로 임관하고 난 이후에 육군 [[제7포병여단]]에서 [[https://21sang.tistory.com/3840|포병장교]]로 복무했지만 중간에 '''급양과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직책을 만드는 업적을 달성했다.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대한민국 해군)|제2함대]] [[사령부]] 편에서 요리대회 심사를 맡았을 때 밝힌 바에 따르면, '''포병여단 본부대 부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간부식당 짬밥이 하도 맛이 없어서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라고 판단하고 그냥 자신의 적성에 맞는 간부식당 일을 했다고 한다. SBS 힐링캠프 78회에서 말하길, 백종원은 포병여단 본부대 부관이었는데 훈련보다는 간부식당에 더 관심이 많았었고, 간부식당을 관리하던 본부대 선임하사(부사관)는 조리보다는 훈련을 맡고 싶어해서 보직을 서로 맞교환 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선임하사의 입장에서는 훈련을 꼭 맡아야 했는데,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부사관의 한직 TOP이 급양 관련 보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백종원은 군대에서 진급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직으로 가도 상관이 없었고, 마침 조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조리 관련 보직을 맡고 싶어했는데 기존 선임하사는 훈련을 맡고 싶어했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흔쾌히 바꿔 준 것이라고 한다. 장교가 자기 임무는 팽개치고 조리실이나 기웃거린다고 여단 참모한테 불려가서 쪼인트를 까이기도 했지만, 식당을 기습 시찰한 [[여단장]]이 밥을 맛보고는 백 [[중위]]의 보직을 정식으로 인정하면서 본의아니게 여단본부 '''급양사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참모]] 장교들의 대우가 180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전역 1년 전부터 간부식당의 운영을 맡아 [[된장찌개]]를 뚝배기에 담아 끓여서 내오는 것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뷔페식으로 바꾸는 업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참고로 <진짜 사나이>에서 언급한 것은 장교 출신이며, 취사일을 했다는 것뿐이었고 나머지의 언급은 힐링캠프에 나와서 한 말이다. 뚝배기는 무겁고 깨지며 관리가 번거롭다. 백종원이 방송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뚝배기 그릇 표면의 미세한 숨구멍으로 세제가 배어 들어갔다가 요리할 때 새어 나오기 때문에 세제를 사용하면 안 되고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철수세미와 물로만 닦아야 한다고. 간부식당이래봤자 실질적인 노동은 병들이 다 하는데 다른 스테인리스 식기와는 따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귀찮은 물건은 [[조리병]]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다.] 명색이 장교인 데다 음식 맛을 본 별들의 선택에 의해 간부식당 관리장교가 된 만큼 사회로 치면 수석 요리사인 [[셰프]] 역할을 하면서 휘하 병력들에게 보조적인 지시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백종원은 장교 출신자 중에서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 전무후무, 그리고 유일무이한 보직인 '급양과장'으로 보임되어 근무한 경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장교나 부사관이 보임될 수 있는 보직인 인사나 군수와 달리 급양관리는 부사관, 그것도 아주 일부를 제외한 보통 ~~운이 없는~~ 초임 중하사가 군수과 밑에서 맡기 때문에 절대로 장교가 임명되는 '과장' 보직이 될 수 없다. 근데 장교가 급양관리를 했으니 급양과장 보직인 셈. 보통 중위가 직을 맡으면 장교(ex.교육장교)이지만 유일무이하기에 바로 과장이 된 것이다. 초기에는 안 그래도 새로 온 [[여단장]]의 입맛이 까다로운데 짬밥 맛이 자기가 먹기에도 너무 별로라서 간부식당 밥맛을 가지고 항상 논의를 하다가, 반 장난으로 [[내가 직접 나서겠다|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진짜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단 본부대 [[취사병]]들은 사회에서 요리를 하다 온 사람들이고, 군기는 군기대로 완전히 빠진 상태라 간부들이 밥맛에 대해 지적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보름 동안 가만히 지켜보겠다고 선언한 다음에 아무도 모르게 무, 칼, 도마를 간부식당으로 가지고 가서 칼로 무를 써는 연습을 매일 4~5시간씩 했다고 한다. 보름이 지난 후에 무생채로 점심 메뉴를 바꾼 다음, 채칼이 아닌 칼로 무를 썰라고 지시하여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이고는 특유의 말빨과 연기력으로 취사병들을 모두 휘어잡고 간부식당을 장악하는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보여준다.[* 칼로 썬 것과 채칼로 한 것은 결이 다르고 굵기와 단면 질감도 다르다. 식감이 달라지는데, 이는 개인 취향이므로 어느 쪽이 우위인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칼로 잘 썬 쪽이 낫다. 반면 대량 급식인 군대에서는 칼질로 무채 만들기는 비효율적인 일인 것도 사실이므로, 백종원이 잘 했다기보다는 기강을 잡기 위한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후에도 메뉴가 정해지면 그 메뉴에 대해서 전날에 미리 엄청나게 공부하고 당일 병사들에게 레시피를 읊어보라고 한 뒤 거기에 참견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써서 취사병들을 휘어잡았고, 이 과정에서 요리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으며 식당을 운영하는 방식과 요령을 깨우쳤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배추를 살 때는 배추가 비를 맞으면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을 이용해서, 비 예보가 있는 날 트럭을 몰고 나가 [[밭떼기|비를 맞은 배추를 트럭째로]] [[선물 거래|싸게 산 다음에]] 이걸 병사 목욕탕에 넣어놓고 절이는 식으로 부식비를 절감시키면서 운영했고, 여단장이 음식 맛이 좋아진 것을 칭찬하면서 더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물어봤을 때 식당에서 뚝배기를 끓일 때 쓰는 업소용 레인지 2대를 구입해서 찌개를 뚝배기에 넣어 배식하는 방식으로 가장 인기있는 메뉴로 등극시켰다고 한다. 전역이 약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한 일인데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임한 듯 하며 오히려 이 일이 재밌어서 외박도 안 나가고 몰두했고 그 여단장에게 '''"1년만 더 하지 않겠냐?"''' 라고 복무연장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백종원은 진급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냥 복무연장을 하지 않고 제대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백종원쌈밥집30대.jpg|width=100%]]}}} || || '''{{{#black 백종원의 원조쌈밥집[* 2003~2005년까지 방영했던 '해결! 돈이 보인다' 라는 프로그램 당시 장면이다. (신동엽의 신장개업이라는 코너를 사실상 흉내낸 프로그램으로 처음에는 이영자와 강성범이 진행하다가 이후 강성범이 하차하고 정석문이 합류한다.) 백종원은 이때 하루 매출 400만 원인 쌈밥 대박집 사장으로 출연하여, 하루 매출이 평균 1만원에 불과한 쪽박집 사장 부부에게 솔루션을 해줬다. 이 솔루션 받은 쌈밥집은 2023년 현재에도 서울 은평구 응암로에서 영업하고 있다.]}}}''' || 전역 후 [[1993년]]에 원조 쌈밥집을 인수하며 [[요식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1994년]]에 지금의 [[더본코리아]]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당시 요식업(지금의 원조 쌈밥집)은 요리 좋아하는 취미 덕분에 돈 좀 버는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가볍게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그의 꿈은 '''세계를 누비는 무역업자'''로, 본인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바로 '''목조주택 사업'''이었다. 힐링 캠프 출연분에서 본인이 설명한 것에 따르면 건축 자재 유통이었다. 당시 회사명은 "다인"이었고, 잘 나갈 때에는 한해에 매출액을 50억원까지 기록시킨 바가 있다. 이 당시 해온 짬밥이 있는지, 골목식당에서 칼국수집 가건물 공사를 했을 때 "이게 제 진짜 전공과목이에요" 라며 자신있어했고 인테리어 업자와 함께 직접 공사견적을 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백종원 인생 최대의 굴곡이 시작되었는데,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로 주택 사업이 망했으며 당시 자신의 수중에는 17억원의 빚과 원조 쌈밥집 가게가 전부였었다고 한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자 결국 [[자살|스스로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장소로 [[홍콩]]을 선택했다. 막상 출국해서는 일단 좀 먹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에 들어오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고, 바로 이때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 17억원의 채권자들을 모두 모은 뒤 그 앞에서 '기회를 주신다면 식당을 운영해서 모두 갚겠다' 라고 말했고 채권자들은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전원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채권자 입장에서도 기회를 주는 편이 득이다. 어차피 기회를 주지 않고 독촉해 봤자 현실적으로 당장 돈을 받기는 힘들며 그럴 바엔 차라리 기회를 주고 장기적으로라도 빚을 받아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빚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다면 돈은 돈대로 날리고 채권자는 채권자대로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나마 백종원에겐 식당이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으며, 채권자들은 이를 통해 채무를 갚을 수 있을 거라 내다봤고 그 예측대로 백종원은 식당 수입을 통해 채무를 모두 갚는데 성공한다.] 이후 백종원은 사업에 전력으로 덤벼들어, 망해가고 있던 원조 쌈밥집 가게부터 시작해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998년]]에 한신포차를 시작으로 [[2002년]]에 본가, [[2004년]]에 해물떡찜0410, [[2005년]]에 새마을식당[* 참고로 새마을식당은 [[김치 크로니클]]에서 등장한 바 있다.], [[2006년]]에 빽다방, 홍콩반점0410 등 내놓는 아이템마다 대박을 치면서 17억이나 하던 빚을 모조리 전부 다 청산하는 데 성공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골목식당 [[백종원의 골목식당/수원 정자동 골목|'수원 정자동' 편]]에서 '쫄라김집' 솔루션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산고등학교]]와 [[예산예화여자고등학교]]가 소속된 학교법인인 '예덕학원'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022년]]에, 백종원이 100억 빚을 남기고 사망했다는 [[가짜 뉴스]]가 [[유튜브]]에서 떠돌아서 논란이 되었다. [[https://www.news1.kr/articles/?4902485|#]] 백종원은 해외 체류 중이며, 잘 살고 있다고 반박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248575?cds=news_media_pc&type=editn|#]][[https://www.db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45|#]] 이후엔 이도 모자라 소유진과의 이혼설을 다룬 가짜 뉴스가 떠도는 등 여러모로 가짜 뉴스에 크게 시달리고 있다. 2023년 현재에도 마찬가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