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정(삼국지) (문단 편집) === [[유비]]의 입촉 === 장송이 형주에서 조조을 만나고 돌아온 뒤 유장에게 조조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도록 권했다. 유장이 말했다. >누가 사자로 갈 만하오? 이에 장송이 법정을 천거했는데 법정이 사양했으나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유봉전에 따르면 당초 유장은 부풍의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재주있고 호탕한 인물로 오라비들의 풍모가 있었다. 백 명의 시비는 모두 검을 쥐고 도열하여 유비는 수레에서 내릴 때 겁을 먹었다. 이에 법정은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도록 권하였다. 법정이 돌아온 뒤 장송에게 유비가 웅대한 계략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여 말하고 은밀히 협력하며 유비를 추대하여 받들길 원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유장은 조조가 장수를 보내 [[장로(삼국지)|장로]]를 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를 틈타 장송이 유장을 설득하길 유비를 맞아들여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하고, 다시 법정에게 명을 받들게 했다. 법정은 유장의 뜻을 전한 뒤 은밀히 유비에게 계책을 올렸다. >명장군(明將軍)의 영명한 재주로 유목(유장)의 유약함을 틈타십시오. 장송은 주(州)의 신임 받는 중신으로 내부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익주의 풍성함을 기반으로 하고 험조함에 기대면 쉬운 일입니다. 유비가 이를 옳게 여기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쪽으로 가서 광한군 부현에서 유장과 만났다. 북쪽으로 광한군 가맹현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 유장을 공격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도#s-3]]가 유장을 설득했다. >파서와 재동의 백성들을 내수와 부수 서쪽으로 모두 내몰고 그곳의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두 불태운 뒤 보루를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판 채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당도하여 싸움을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오래도록 군량을 얻을 곳이 없으니 백 일이 되기 전에 필시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날 때 공격하면 틀림없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를 듣고 증오하여 법정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끝내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유장이 그 수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백성들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리고는 정도를 내치고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군(軍)이 낙성을 포위하게 되자 법정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저 법정이 본래 재주가 부족해 맹호(盟好)가 훼손되게 하였으나, 좌우(左右-주변)에서 본말(本末)을 분명히 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제 탓으로 돌려 모욕을 입혀 내 몸을 망치고 그 욕됨이 집사(執事-귀하)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우니, 이 때문에 바깥에서 몸을 상하면서도 감히 반명(反命-복명. 일을 보고함)하지 못했습니다. 성청(聖聽-귀한 사람이 귀로 듣는 것)이 제 말을 싫어할까 두려워 그 사이 전(牋)을 올리지 않았으나 예전의 대우를 돌이켜보면 첨망(瞻望-우러러봄)하며 슬플 뿐입니다. 그러나 앞뒤로 오로지 복심(腹心-진심)을 피력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속마음을 감추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나 다만 제가 어리석고 꾀가 부족하며 정성(精誠)으로 감복시키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국사(國事)가 이미 위태롭고 화해(禍害-화란, 재난)가 곧 닥칠 것이기에 비록 바깥에 버려진 신세로 제 말이 증오를 더할 수도 있으나 소회(所懷)를 극진히 토로해 남은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 >명장군(明將軍-유장을 지칭)의 본심은 저 법정이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구구하게 좌장군(左將軍-유비)의 뜻을 잃고 싶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좌우에서 영웅의 종사지도(從事之道)에 통달하지 못해 신의를 어기고 맹세를 욕되게 해도 된다고 말하며, 의기(意氣)로 서로 맞추어(意氣相致) 해와 달이 서로 바뀌듯 하고(日月相遷) 귀로 듣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운 것(順耳悅目)을 추구(趨求)하여 아첨하는 말로 뜻에 맞출 뿐. 원려[* 遠慮-앞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이다.]로써 나라를 위한 심원한 계책을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사태가 이미 변한 뒤에도 또한 강약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니, 좌장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양곡의 비축이 없다 하며 다수로 소수를 공격해 광일(曠日-많은 날을 허송세월함)하며 서로 대치하려 합니다. 그러나 관(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곳은 번번이 격파되었고 이궁(離宮), 별둔(別屯)은 날마다 절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록 낙성(雒城) 아래에 만 명의 군사가 있지만 모두 군진이 무너진 병졸들(壞陳之卒)이며 격파된 군의 장수들(破軍之將)이니 만약 하루아침의 싸움을 치르려 한다면 그 군사와 장수의 세력으로는 실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 >멀리 기약하여 각각의 군량을 헤아려본다면, 지금 이쪽 둔영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곡미(穀米-곡식)가 이미 쌓여 있으나, 명장군의 토지는 날로 깎이고 백성은 날로 곤궁해지니 적대하는 자들이 많아져 곡식을 공급해야 하는 곳은 멀리까지 확대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헤아려봐도 필시 (그쪽이) 먼저 곡식이 고갈하여 장차 다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헛되이 서로 지키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장익덕(張益德-장비)의 수만 군사가 이미 파동(巴東)을 평정하고, 건위(犍爲)의 경계로 들어와 군을 나누어 자중(資中-건위군 자중현), 덕양(德陽-광한군 덕양현)을 평정하며 세 갈래 먼 길로 침범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를 어찌 막으시렵니까? > >본래 명장군을 위해 계책을 꾸민 자는 필시 이쪽 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없고 궤운(饋運-운량)도 미치지 못하며 군사는 적고 뒤잇는 군사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 형주로 통하는 도로가 뚫려 군사 수가 열 배인 데다 손거기(孫車騎-거기장군 손권)도 동생과 이이(李異), 감녕(甘寧) 등을 보내 뒤를 잇고 있습니다. > >만약 주객의 형세(客主之勢)를 다툼에 있어 토지로써 승리를 결정한다면 지금 이쪽은 파동(巴東)을 전부 차지하고 광한(廣漢), 건위(犍爲)는 절반 이상을 평정하였고 파서(巴西) 한 군(郡) 또한 명장군의 소유가 아닙니다. 헤아려보건대 익주에서 의지하는 바는 오로지 촉군인데 촉군 또한 파괴되었습니다. 3분의 2를 잃은 데다 관원과 백성들은 피폐해져 난을 일으키려 생각하는 자가 열 호(戶) 중에 여덟 호나 됩니다. 적이 멀리 있어도 백성들이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니 적이 가까워지면 하루아침에 주인을 바꿀 것이고, 광한군의 여러 현들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 >또한 어복(魚復-파군 어복현)과 관두(關頭)는 실로 익주의 복화지문(福禍之門)이나 지금 두 문이 모두 열리고 견고한 성이 모두 떨어졌으며 제군(諸軍)들이 아울러 격파되어 군사와 장수들이 함께 소진되었습니다. 적이 여러 길로 아울러 진격하여 이미 심복(心腹-가슴과 배, 중심부)에까지 들어왔는데, 앉아서 도읍과 낙성을 지키고 있으니 존망지세(存亡之勢)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대략적으로 그 겉만 견주었을 뿐, 그 나머지 굴곡(屈曲-상세한 전말)은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 >저 법정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이 일이 다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명장군 좌우의 밝고 지혜로운 모사들이 어찌 이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총행을 탐하며 용납되기 위해 아첨부리고, 원대한 계획을 꾀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해 좋은 계책을 바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사세가 궁박해지면 각자 살 길을 찾아 그들의 문호(門戶)를 구제할 뿐 언행을 뒤집어 지금 (그들이 말하는) 계책과 다를 것이니, 명장군을 위해 사난[* 死難-국가의 위난에 처해 목숨을 바친다.]을 다하지 않고 존문[* 尊門-상대방의 가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이 오히려 그 우환을 뒤집어 쓸 것입니다. > >저 법정이 비록 불충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내심 스스로는 성덕(聖德)을 저버렸다 생각지 않으며 분의(分義-분수에 맞는 정당한 도리)를 돌이켜 생각하며 실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좌장군께서는 처음 촉에 들어올 때처럼 옛 마음이 여전하며 실로 박대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생각건대 변화를 꾀한다면 존문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214년, 진격하여 성도를 포위했는데, 유장의 촉군태수 [[허정(삼국지)|허정]]이 성을 넘어 항복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성사되지 못했다. 유장은 위태로움이 극에 달하여 망할 위기가 눈앞에 닥쳤으므로 허정을 죽이지 않았다. 유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했을 때 유비는 허정을 박대하며 임용하지 않았다. 이에 법정이 설득했다. >천하에 헛된 명예를 얻고도 내실이 없는 자가 있으니 허정이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 주공께서는 천하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으나, 허정의 헛된 명성은 이미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주공께서 어진 이를 천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에 유비가 허정을 후대했다. 장비전에 따르면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법정·장비·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은 천 근·5천만 전·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