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드로 (문단 편집) == 성경에서의 묘사 ==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어부]]였다. 그래서 기존에는 하층민이었을 것이라 설이 지배적이었다가, 시대가 흘러 당시 [[갈릴래아 호|갈릴래아 호수]]의 어업이 장사가 잘되는 고부가 산업이라 중산층이며 교육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현대에도 어업은 힘들지만 운만 따라주면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나름 고부가 산업이다. 베드로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토대로 베드로가 부유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근거가 미약해 학자들의 비주류 의견 정도. 또한 그 집터라는 것도 진짜 베드로의 집터라는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가난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예수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교]]의 랍비도 나름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연설을 듣고 놀라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베드로의 인상이 무식해 보여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대체로 고대로 갈수록 '외적인 아름다움 = 내적인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좋은 연설을 하는 바람에 놀랐던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받았다고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0.wp.com/12-Keys.jpg|width=100%]]}}} || ||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예수|그리스도]], 암브로지오 부온비키노, [[성 베드로 대성당]] 파사드 || 천국의 열쇠와 관한 내용은 가톨릭 교황의 권위와, 종교 개혁 시대의 사도 전승 논쟁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므로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https://www.academic-bible.com/en/bible/NA28/MAT.16|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 원문은 Nestle-Aalnd 28판을 사용했다. 이하 같다.] || ||<-2> '''^^18^^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19^^δώσω σοι τὰς κλεῖδα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ὃ ἐὰν δή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δεδε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ὃ ἐὰν λύ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λελυ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18^^kagō de soi legō hoti sy ei Petros, kai epi tautēi tēi petrāi oikodomēsō mou tēn ekklēsian kai pylai hāidou ou katischysousin autēs, ^^19^^dōsō soi tas kleidas tēs basileias tōn ouranōn, kai ho ean dēsēis epi tēs gēs estai dedemenon en tois ouranois, kai ho ean lysēis epi tēs gēs estai lelymenon en tois ouranois.] || ||^^18^^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Mt/16|가톨릭 새번역]] ||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2&CI=10256&CV=99|개신교 새번역]] || [[가톨릭]]은 이 내용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천국 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지며, 여러 전승에서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진 [[문지기]]로 등장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의 교황들에게 맡겨진 [[교황수위권|직무]]는 여기서 근거한다. [[정교회]] 역시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총대주교가 사도 전승을 잇는 모든 주교들 중 으뜸임은 인정한다. 이를 '명예 수위권'이라 부르긴 하지만, 로마 바깥의 교구에 대한 결정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The bishop of Rome would be, by ancient custom, the “first” of the world’s bishops and of the regional patriarchs. His “primacy of honor” would mean, as it meant in the early Church, not simply honorific precedence but the authority to make real decisions, appropriate to the contexts in which he is acting. >[로마 주교의 권한은 고대 관습이 그러했듯이 세계 주교들과 지역 총대주교들의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의 "명예 수위권"은 단지 존경적인 수위가 아니라 실재로 결정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활동하는 맥락에 고유한 것이다. -고대 교회가 의미하둣이-] >---- >[[https://www.assemblyofbishops.org/ministries/ecumenical-and-interfaith-dialogues/orthodox-catholic/|The North American Orthodox-Catholic Theological Consultation]], 「Steps towards a Reunited Church: A Sketch of an Orthodox-Catholic Vision for the Future」, 2010-10-02, 제7항 a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교황권의 근거로 보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반석'이 여기서 베드로를 의미하고 베드로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걸 교리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베드로전서 2:5-8)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린도전서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라디아사 2:9;에베소서 2:29;베드로전서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 >-《호크마 주석》 >''Rock''(Aram. ''Kēphā'').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 On building on a rock, or from a rock, cf. Isa li 1 ff.; Matt vii 24 f. ''Peter as Rock''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future community {{{-2 (cf. ''I will build'')}}}. Jesus, not quoting the OT, here uses Aramaic, not Hebrew, and so uses the only Aramaic word which would serve his purpose. >'''In this view of the backgrond of vs. 19, one must dismiss as confessional interpretation any attempt to see ''this rock'' as meaning the faith, or the Messianic confession, of Peter. To deny the pre-eminent posotion of Peter among the disciples or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s a denial of the evidences.''' Cf. in this gospel x 2, xiv 28-31, xv 15.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2 cf. Gal ii 11 ff.)}}}. >{{{[}}}''바위''([[아람어]]. ''Kēphā'').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바위 위에, 혹은 바위로부터 건설을 하는 것에서 {{{-2 (cf. 이사 51,1 ff.; 마태 7,24 f.)}}} ''바위로서의 베드로''는 미래 공동체의 기반이 될 것이다{{{-2 (cf. ''내가 ... 세울 터'')}}}. 예수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그렇게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유일한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19절을 볼 때는 어떠한 교파적 해석도 떨쳐버려야만 한다. ''이 바위''가 베드로의 믿음라느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느니 하는 시도를 떨쳐버려아만 한다. 베드로가 제자단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가진 탁월한 포지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2 (Cf. 마르 10,2; 14,28-31; 15,15.)}}}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2 (cf. 갈라 2,11 ff.)}}}.{{{]}}} >----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https://www.amazon.com/Matthew-Translation-Introduction-Commentary-Anchor/dp/038508658X|《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베드로'라는 직함 자체이다. 통상 이것이 '시몬이 베드로로 개명되었다'고 인식되지만, Albright와 Mann이 지적했듯이 '베드로'는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이 사람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아람어 케파이든 희랍어 페트로스이든 인명{{{-2 (人名)}}}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몬이 베드로로 개명한 게 아니라 시몬이 '베드로'라는 직함을 받은 것이며, 이는 마치 예수에게 '그리스도'{{{-2 (메시아)}}}라는 직함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시몬과 예수의 말이 상호 대구{{{-2 (對句)}}}를 이루고 있다. 시몬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응답한다: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sy ei ho christos] >너는 그리스도이다^^직역^^ 그러자 예수는 '시몬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규정한다: >σὺ εἶ Πέτρος >[sy ei Petros] >너는 베드로이다^^직역^^ 곧, 시몬이 예수에게 '너는 그리스도이다'라고 고백하고, 즉시 예수가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예수에게는 '기름부음받은이'의 직함이 시몬에게는 '바위'의 직함이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바울로는 시몬을 '케파'라고 부르는데{{{-2 (1고린 1,12; 3,22; 9,5; 15,5; 갈라 2,9; 2,11; 2,14)}}} 희랍어 '페트로스'와 아람어 '케파'가 초기 교회에서 모두 쓰인 것은, '베드로'가 '개명된 새 이름'이 아니라 '미스터 바위'로 이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모두 쓰이는 건 인명{{{-2 (人名)}}}이 아니라 별명이나 직함이기 때문이다.{{{-2 (예: 메시아^^아람어^^ - 그리스도^^희랍어^^)}}}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1세대 교회의 신앙고백문에서도 베드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2> [[https://www.academic-bible.com/en/bible/NA28/1CO.15|고린토 전서 15장 3-5절]] || ||<-2> '''^^3^^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4^^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5^^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 ^^3^^paredōka gar hymīn en prōtois, ho kai parelabon, hoti Christos apethanen hyper tōn hamartiōn hēmōn kata tas graphas ^^4^^kai hoti etaphē kai hoti egēgertai tēi hēmerāi tēi tritēi kata tas graphas ^^5^^kai hoti ōphthē Kēphā&i eita tois dōdeka·] || ||^^3^^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4^^묻히셨으며, 또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5^^'''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 || [[https://bible.cbck.or.kr/200/1Cor/15|200주년 신약]] ||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SAENEW&VL=46&CN=15&CV=99|개신교 새번역]] || 고린토 전서 15장에서 바울로는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을 언급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초기 교회의 정식화된 신앙고백이라고 본다. 즉, 바울로가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도 교회에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라는 발현 정식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루가 복음서에서도 이런 인식을 볼 수 있는데, 루가 복음서의 발현 기사에서는 ||ㄱ. 여자들에게의 천사 발현 {{{-2 (24,1-8)}}} ㄴ. 베드로의 빈 무덤 확인 {{{-2 (24,9-12)}}} ㄷ.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의 예수 발현 {{{-2 (24,13-35)}}} ㄹ. 11제자에게의 예수 발현 {{{-2 (24,36-53)}}} || 순으로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런데 ㄷ 말미의 34절에서, 약간 뜬금없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2> [[https://www.academic-bible.com/en/bible/NA28/LUK.24|루가 복음서 24장 34절]] || ||<-2> '''ὄντως ἠγέρθη ὁ κύριος καὶ ὤφθη Σίμωνι.'''[* ontōs ēgerthē ho kyrios kai ōphthē Simōni.] || ||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Lk/24|가톨릭 새번역]] ||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SAENEW&VL=42&CN=24&CV=99|개신교 새번역]] || 루가 복음서의 다른 발현 보도와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 문구는, 바울로의 경우와 유사하게 초대교회의 짤막한 발현 정식이다. 여기에서도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도들보다는 왠지 신비성이 떨어지고 세속적이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는 베드로가 이례적으로 사도들 중에서 복음서의 서술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사도인데, 위에 등장한 신앙 고백같이 좋은 이야기는 딱히 등장하지 않고 대체로 부족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도라는 것 자체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 군중들이 돌아가는 동안 [[예수]]는 제자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했는데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저어 가다 밤이 되자 거센 역풍이 불고 물결이 거칠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물 위를 걸어 이쪽으로 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유령인 줄 알고 떨지만 그는 예수였고 다들 안심하라고 이른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이시라면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해 주시라고 청하고, 예수가 승낙하자 처음에는 성공하지만 몇 걸음 걷다 거친 비바람에 겁을 먹자마자 머리까지 쑥 빠지고 만다. 베드로가 어푸어푸거리면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는 즉시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도로 서게 하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라고 질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그 이야기에서는 실은 베드로가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걸 보고는 자기도 걷고 싶다고 여겨 걸어보았는데 걷고 보니 교만심이 생겨서 그만 물에 빠져버렸고 결국 예수가 구해줘야 했다. 그 후 베드로가 예수에게 자신은 왜 물에 빠졌던 것이냐고 여쭙자 예수가 베드로를 질책했다는 이야기다.]그리고 예수와 베드로가 함께 배에 타자 바람은 거짓말같이 그쳐 잠잠해졌다. *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죽으러 출두하는 것을 막다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질타를 듣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수난을 당하여야 된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대경실색하며 "주님 안 됩니다." 하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수난을 당한다는 말을 접하고 뜯어 말리려 드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만, 세속의 관점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일을 판단하려 드는 것에 대해 스승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질타를 얻어 들은 것이다. 게다가 원문상 베드로와 예수가 각각 사용한 [[희랍어]] 동사인 ἐπιτιμᾶν{{{-2 (epitiman)}}}는 '비난하다' 정도의 굉장히 강한 표현이다. 즉 베드로가 예수에게 그래선 안 된다고 비난하고{{{-2 (epitiman)}}}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비난하는{{{-2 (epitiman)}}} 장면인 것이다.[[http://www.holynetworknews.com/board/?r=home&c=5/12&uid=947|#]] 물론 이는 복음서가 특별히 베드로 개인을 속물로 묘사하려 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 알려지고 유명한 제자인 베드로의 속물적 인품과 약점을 통해서 제자단 전체의 속물적 인품과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공관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파스카 전{{{-2 (前)}}}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베드로{{{-2 (마태 16,22 및 병행구)}}}, 마리아{{{-2 (루카 2,48)}}}, 야고보{{{-2 (마르 3,21)}}} 등 존경받고 유명한 교회 인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렇게 비판 받으니 그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감상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현대 성서주석학의 연구 성과를 반대로 오독한 것이며, 오히려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신약 저자들에게 당연했기에,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이 부각된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야말로 현대 주석학에 부합한다. 즉 마르코 복음서, 더 나아가서 신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베드로의 약점들은 그가 대표하는 '교회'의 약점이다. 그렇기에, 앵커바이블 주석에선, 마태 16,21-23을 해설하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Peter spoke for the rest in confessing Jesus as Messiah, and here he is their spokesman in protecting the need for the Messiah to suffer and to die.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같은 책, p.200 * 예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뒤 배신을 때린 일. 이후엔 회개하여 이것은 용서받은 것으로 친다고 하지만, 하여튼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매우 중요하며 굉장히 유명한 대목이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너는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 혹은 첫 닭이 울기 전.]까지 나를 '''3번이나''' 부정할 것이다." 하고 예언하였다. 그날 밤 예수는 체포당했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그대로 도망쳤다.[* 도망치기 전 예수가 막 체포당했을 때 칼을 꺼내서 예수를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랐다고 한다. 이에 예수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제지시키고 잘린 종의 귀를 다시 복구시켜 준다.] 그리고 베드로의 얼굴을 사람들이 알아보자 예수가 누군지도 모른다며 계속 부정했고, 심지어 마지막 3번째에는 "내가 예수랑 정말 아는 사이면 난 천벌을 받을 거다!"라고까지 하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저주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부정하자마자 바로 새벽닭이 울었다.[* 종종 [[성당]] 옥상 지붕 끝에 [[십자가]]가 아닌 [[수탉]] 조형물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던 날 베드로의 행동과 연결된 동물이 닭이기 때문이다. 닭은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정과 회개를 상징한다. 이를 교회의 상징으로 지정한게 교황 [[레오 4세]]이다.] 베드로는 그 순간 예수의 예언이 떠올라서 대성통곡을 했다. 이후로는 고향인 갈릴래아 호숫가로 돌아가서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다시 어부 노릇을 하며 지낸다.[br][br][[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다시 베드로에게 나타나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고 아침 식사를 함께 한다. 식사가 끝난 뒤 기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이렇게 묻는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전에 베드로가 예수를 3번 부인하거나 배신했던 문제는 일절 들먹이지 않았다. 옛 잘못을 다시 언급하며 질책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물론 "사랑합니다!"를 외쳤지만, 예수는 그 질문을 일부러 '''3번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의 행동의 의도를 깨닫고는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정확하게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내 양들을 돌보아라'를 세 번 반복한다.] 흡족해한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즉, 예수가 떠난 뒷일을 부탁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하며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사실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쓰인 "사랑"은 [[그리스어]] 원서에서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엔 단순한 용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요한 복음서]] 문서 참고. 이처럼 고집이 세서 말도 안 듣고, 열 받으면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고, 치기심에 한 말도 잘 지키지 못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듯 딱히 잘나거나 우월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하여 제자들 중의 으뜸이자, 제자단 및 교회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1세기에도, '미스터 바위'라는 이 이상한 별명의 사도는 교회에서 매우 유명하고 존경 받는 리더였다. 그리고 성경은 이미 잘 알려지고 유명한 베드로라는 사도에게, 속물적 모습과 영웅적 면모가 공존하는 교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제자단도, 21세기의 교회도, ''''마치 베드로처럼'''' 속물적 모습과 영웅의 면모가 공존하는 매우 복합적인 공동체이다. 지상의 교회는 완덕{{{-2 (完德)}}}에 도달한 사람만 있는 무균실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예수는 지상의 교회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 그러니까 죄인들의 공동체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속물적인 죄인들의 공동체야말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2 (1고린 11,26)}}} "부활을 선포"{{{-2 (사도 4,2)}}}하는 자리이다. 성경 역시도 근본적으로 교회의 문헌이기에, 지상에 남아있는 것은 사실 교회의 메시아 고백{{{-2 (마태 16,16)}}}과 교회의 부활 목격 증언{{{-2 (1고린 15,5)}}} 뿐이다. 교회의 모습이 때로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우습고 졸렬하고 속물적으로 보이더라도, 이 교회야말로 메시아 고백과 부활 선포를 간직한 공동체이다. 이 교회를 그리스도인은 '믿어야' 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신경]]에는 둘 다 "교회를 믿나이다"라는 고백 문구가 들어간다. 비록 '교회을 믿는다'와 '그리스도를 믿는다'가 똑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실상 토마스의 불신{{{-2 (요한 20,24-29)}}}도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증언'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과 함께 스승을 배신한 속물적이고 졸렬하고 우스운 형제들을 단지 불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신을 그리스도는 마치 자신에 대한 불신인 것처럼 꾸짖는다.{{{-2 (요한 20,29)}}} 성경 속 베드로는 교회가 가진 이 양면성을 하나의 인격에서 모조리 보여주고 있다. 메시아의 의미를 몰랐지만{{{-2 (마태 16,22)}}} 스승이 메시아라는 고백은 이 무지한 제자에게서 나왔다.{{{-2 (마태 16,16)}}} 절대 스승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2 (마태 26,33)}}}, 막상 스승이 잡히자 관계를 부인했다.{{{-2 (마태 26,70)}}}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는 발현한 스승을 처음엔 못알아봤지만{{{-2 (요한 21,4)}}} 동료 제자가 알려주자 그 자리에서 호수에 뛰어들어 무려 200페퀴스{{{-2 (약 100m)}}}를 헤엄쳐 스승에게 다가간다.{{{-2 (요한 21,7-8)}}}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이 양면적인 제자가 일어나 복음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2 (사도 2,14-36)}}} 이 속물적이고 졸렬하고 우스운 제자의 선포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다고{{{-2 (마태 16,17)}}} 믿을 때 교회가 현존하는 것이다. [youtube(waK7q-fv5bU)] 사실 베드로의 성격은 엄밀히 따지면 [[다혈질|성격이 급하고 감정에 솔직한]] 것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예수]]가 스스로의 죽음을 예언하자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류를 하였으며, 또한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는 두려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도주를 하였다가 죄책감 때문에 오열을 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 21장에서, 예수가 사랑하냐고 반복해서 묻자 슬퍼하였다는 대목과, 예수의 바로 옆에서 계속 사랑과 용서에 관한 말을 계속 들었음에도 예수가 잡혀가게 되자 스스로의 감정을 못 이기고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칼부터 꺼내서 병사의 귀를 싹둑 잘라버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 여러모로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대비되는 인물이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제1사도로서 그가 일으킨 기적은 수없이 많다. 특히 유명한 일은 [[사도행전]] 3장[* 사도행전 3장 2~10절.]에서 성전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일어나게 한 기적과, 5장[* 사도행전 5장 1~12절.]에서 재산을 판 돈의 일부만 바치고선 전부를 바쳤다는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하나니아스와 사피라[* 가톨릭성경과 공동번역 성서에선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개역개정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표기한다.]) 부부의 죄를 밝혀낸 사건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둘은 베드로에 의해 죄가 드러난 직후 급사했다.] 사실 기적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당시 제자들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였고, 예수의 사후에도 전체 교회의 리더 일을 하였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업적은 바오로와는 다른 의미에서 매우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와 교황직의 관련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논쟁은 민감한 사안이지만, 베드로가 1세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방인 신자와 율법에 관한 당대의 논쟁에서, 베드로는 양쪽 입장(예루살렘 교회 vs 바울)의 중간에 끼어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욕먹기 쉬운 중도파 역할을 수행했다.''' 신약 성경 속 베드로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 요한, 바울, 안티오키아 교회와 각각 모두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베드로가 왜 초기 교회에서 중요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의 안티오키아 사건도,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하면 중도파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 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 >----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93|《바울로》]]{{{-2 ''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uege''}}}, 분도출판사, 2008. 160쪽 [[할례]] 문제로 이민족 [[그리스도교]] 입교자들과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간에 교리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민족은 할례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여 그리스도교 전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당시 많은 비유대인들이 유대교에 호감을 느꼈으나, 할례가 부담스러워서 [[개종]]은 하지 않고 '[[야훼|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외국인'으로 지냈다. 이는 할례가 단순한 수술이 아니라, 유대교의 복잡한 의식과 율법을 모두 지킨다는 서약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베드로 또한 원래 할례 문제에서는 [[유대인]]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로 코르넬리오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하고, 세례를 베푼 경험을 생각하며, 율법의 규레를 부과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음행, 목 메인 것이나 짐승의 생피 등 최소한의 율법만을 지키게 하자고 한것이다. 그런데 할례 문제로 바오로에게 대놓고 공개 디스를 먹기도 했다. 바오로에게 공개 디스를 먹은 이 사건이 단순히 베드로의 외식이라기보다 이때 접한 자들이 [[야고보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진('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유명한 그) [[예수의 형제 야고보|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갈 2:12) 율법에 엄격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였기 이방인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며 이를 책망받을까 봐 두려워한 듯하다. 이것은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있어서는 거침이 없었던 바울로와, 대조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비유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와의 화합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신중한 중도파 베드로의 성향 차이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보편 서간'으로 분류되는 베드로 1서, 베드로 2서의 필자가 사도 베드로를 자칭하고 있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사도 베드로가 저자가 맞다고 인정하지만 초대 교회부터 저자에 대한 논란은 쭉 지속되었다.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두 책 모두에 대해서 베드로의 친저성을 조심스럽게 본다. 그나마 베드로 1서의 경우, 베드로가 저술했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현대 주석학자들도 있지만,[* 가령 엘레나 보세티{{{-2 ''Elena Bosetti''}}}는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https://bundobook.co.kr/goods/view?no=14291&setMode=pc|#]]] 베드로 2서는 내용이 [[유다서]]에 의존적인 등의 이유로 신약 성경 중 가장 늦은 2세기 초중반에나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