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스파시아누스 (문단 편집) === 내전 수습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종결 ===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네로 후기와 세 황제의 난립기로 인한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진력하였다. 최대한 보복을 줄이는 방법으로 네로 자살 이후 터진 내전 치유와 제국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비텔리우스파의 난동으로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고 방만한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유지 재측량 작업으로 상당한 국고수입 증대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공중변소의 오줌에 세금을 물리기도 했다. 단, 오줌 누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오줌을 수거해서 표백이나 세탁 등에 쓰는 업자들에게 오줌 사용료를 내라는 의미다. 이때 아들인 티투스가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는데 그의 앞에서 금화를 보여주며 '배뇨세금으로 만든 이 금화에 냄새가 나냐?'라고 한마디 했고 여기서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한다. ][*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이라는 뜻이라고. 실제로 이탈리아어 사전에 [[http://itdic.naver.com/#entry/768696|vespasiano]]라고 찾아보면 '(남자용) 공중변소'라고 나온다.] 재정수입의 증대 덕에 그의 아들들 대까지 콜로세움과 같은 공공 건축 사업을 원활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비텔리우스 형제와 아들을 제거한 뒤, 네로 시대의 [[피소 음모]]로 피해를 입고 갈바의 양아들이 됐다가 억울하게 피살된 피소 리키니아누스 문제를 재조사해 신원복구해주기 보다는 이를 이유 삼아 탄압하는 태도를 취해 이 부분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때 그는 오래된 명문 피소 가문의 남성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대거 처형, 추방하고 반대파가 될 귀족 가문들까지 싸잡아 원로원에서 내쫓는 등의 이해 못 할 정치적 숙청을 자행했다. 이 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 즉위에 도움을 준 장군들, 즉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를 반강제로 퇴역시키거나 정치공작을 통해 묘한 분위기를 조성해 은퇴시켰다. 이들은 자체 무력을 보유하고 즉위 과정에서 비텔리우스와의 내전을 대신 치뤄줬기 때문에 그대로 둘 경우 권신이 될 우려가 높아 숙청 자체는 불가피했고, 다른 황제 같으면 죽였을 것을 그나마 명예롭게 은퇴하는 식으로 추방한 것은 그나마 잘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이 숙청 작업은 근위대장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티투스가 담당했는데, 이는 티투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인기가 형편없게 된 원인이 됐다. 아울러 티투스 즉위 후 이런 보복이 줄었다고 해도 후일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가 되면 황제가 앞장서서 이 작업을 하면서 원로원과 황제 사이의 힘 대결 양상으로 확전된다. 어쨌든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이후 장남 티투스를 앞세워, 본인은 관용을 베푸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고 뒤로는 계속되는 명문 귀족 숙청 및 추방으로 권력 강화에 매진하며 내전 수습에 매진한다. 헌데 이런 비열한 정적 숙청 방법은 짧게 보면 기사계급 출신 신흥 황제 가문의 권력 기반 안정에는 도움이 됐음에도, 결과론적으로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종말로 연결됐다. 이 외에도 그는 비텔리우스 즉위 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로 터진 [[바타비아 반란]], 오늘날 [[벨기에]]에서 시작돼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는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에게 두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내렸는데 그는 1년만에 두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 키빌리스의 반란은 초기에는 군단장 보쿨라는 전사, 군단장 루페르쿠스는 포로로 잡혀 살해당하는 등 고전했으나 결국 반란의 근거지 [[트리어(독일)|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탈환하여 진압했고 키빌리스는 로마 영토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벨기에에서 일어난 켈트족 반란의 경우, 일찍부터 로마화되고 난 이후부터 로마 주류사회로 편입되어가던 갈리아 속주 내 켈트인들의 무관심으로 호응도 크게 못 얻고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 서방에 이어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 후, 후임으로 유대 전쟁을 총괄한 황제의 장남 [[티투스]]의 손에서 마무리되어갔다. 로마군을 이끌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유대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전쟁은 유대인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양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었고,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은 처형되거나 로마로 끌려간다. 특히 로마에 저항한 본보기로 예루살렘 신전 등이 모두 약탈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