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스파시아누스 (문단 편집) === 원로원 개편과 내정 개혁 === 베스파시아누스는 한평생을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 반대파들을 억누르기보단 설득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원로원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제정을 공식적인 제도로 만들고 공화정을 부인하면서 제국의 통치자는 황제이며 황제는 원로원보다 위에 있다며 선은 분명하게 그었다. 69년 처음 황제로 공표될 당시, 그는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리는 제위계승법을 만들면서, 이런 그의 원로원 존중 태도를 확고히 보여주고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직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카피톨리누스 신전 내에 동판으로 법령을 새긴 뒤 이를 설치했다. 그 동판에는 명문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보와 그 정통성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로 말한 뒤 브리타니쿠스를 그 마지막 직계로 언급하고 공적으로 탄핵된 네로를 제외하면서, 플라비우스 가의 정통성이 클라우디우스에서 나왔다고 명기됐다. 또 그는 원로원에서 현군의 예시로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했는데, 원로원과 사이가 껄끄러웠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티베리우스는 말년을 제외하곤 늘 원로원을 존중해줬지만, 양쪽의 관계는 티베리우스가 20대부터 항상 다투었기에 쌍방으로 냉담했다. 이런 이유로 후임황제들로서는 그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정작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나 클라우디우스처럼 황제 이름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다. 왜냐하면 이 황제가 생전 원로원에게 한 “스스로 노예가 될 준비를 한 인간들”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된 망언으로 취급받았고, 백년이 지난 뒤에도 티베리우스처럼 하겠다는 말은 원로원을 대놓고 거수기처럼 취급하겠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 네로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해당 황제가 기념식이 없어 언급하기 곤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칼리굴라가 이 경우에 해당됐다. 베스파시아누스 개인 입장으로는 그의 출세와 성공의 은인이었지만, 재위 기간도 4년 밖에 안되고 황제권 강화나 수도교 건설입안, 이탈리아 경제 부흥 계획 등 외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언급하지 않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 또 내전 직후, 새황제가 칼리굴라를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 앞에서 언급하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처럼 원로원과 대립하겠다는 의미도 있기에, 정치적 부담도 상당했다.] 원로원의 체면이나 플라비우스 가문의 정통성을 이유로 제위를 계승한 적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당시 원로원 입장에서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싶던 황제는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였다. 이들은 원로원을 존중하면서도 무시했던 티베리우스나 냉담하고 변덕스러운 칼리굴라 같은 황제처럼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비난받고 있었다. 따라서 원로원에게 금지어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감찰관 부임 후 기존 원로원의 위상과 자부심을 존중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원로원을 서서히 약화시켜나갔다. 네로 사후 혼란기 동안 당시 원로원 수는 2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국과 속주 내에서 무려 800명의 인사들을 선별해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충원하고, 그들을 원로원 귀족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원로원은 70년 이후 사실상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리비우스 왕조에 협력적인 인사들로 자연스레 교체하는데, 과거 네로 시대에 중용받던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자들보다 그가 더 신경써준 지방은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소외된 갈리아 남부와 서부, 히스파니아 일대였다.[* 과거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역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출신들에게 동방 출신 못지 않게 원로원을 개방했지만, 카이사르처럼 아예 이쪽 출신들에게 귀족 자리도 주고 그들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느끼게 해준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두 황제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차남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형과 다르게 그리스,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출신들에게 원로원이나 고위관직을 많이 하사했다.] 이처럼 원로원을 약화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제국 행정부를 강화시켜나갔다. 이 조치는 내전을 치르면서 항구적인 행정을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으며, 과거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동안 관료층을 서서히 차지하던 해방노예 출신들을 다시금 밀어내고 기사계급으로 채워넣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근위대장과 근위대의 힘을 통해 정적을 솎아냈는데, 이 중책을 맡게 된 이는 후계자 티투스였다. 이런 내정 개혁 중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후세까지 큰 명성을 가져오게 한 개혁은 재무행정 분야였다.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황제에게 재무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던 사람답게 그는 네로의 사치와 내전기 혼란으로 바닥난 국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본래부터 꼼꼼하고 검소한 사람답게 그는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등을 부과[* 오줌세의 직접적인 과세 대상은 양모 가공업자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래도 원체 반발이 심했던만큼 그가 죽고 난 뒤 티투스 치세 때에 그를 비판하는 연극이 오르기도 했었으나, 관대한 티투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네로 시대 이후 박살난 나라살림을 재건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세수의 기본이 되는 인구, 재산 조사를 실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횡령을 적극 색출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이는 불필요한 공공지출에 관한 내용일 뿐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 경비, 사회 인프라, 교육 분야에서의 공공지출은 확대했다.]. 하지만 속주들에게는 새로 만든 세금들을 적극적으로 부과했다.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여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유지한 것이다.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가장 만만한 게 속주세였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