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바누 부흐투르 ===== 십자군 시기 베이루트 동남쪽 산지, 즉 가르브에는 부흐투르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8세기 레바논 산지에 정착한 타누크 연맹의 한 갈래로, [[드루즈]] 이슬람을 믿는 아랍 부족이었다.[* 본래 그 지도자인 알리 이븐 알 후세인의 증조부의 이름에서 기인한 바누 아비 압둘라로 불리다가 알리의 아들 나히드 앗 다울라 부흐투르의 활약 이후 바누 부흐투르로 불리게 되었다.] 1110년 베이루트 점령 당시 십자군은 성안 뿐만 아니라 수비를 도운 인근 산지의 타누크 계열 아미르 아두드 앗 다울라의 아르슬란 가문까지 학살하였고,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 툭테긴은 그 자리에 부흐투르 가문을 두어 십자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1120년에는 자지라 출신의 마안 가문을 가르브 남쪽 쇼우프에 정착시켜 그들을 보조하게 하였다. 베이루트에서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부흐타르 부족은 [[부리 왕조]]의 국경을 방어하였고, 1147년 6월 족장 부흐투르는 가르브의 아미르로 봉해졌다. 이듬해 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포위 당시 가르브 출신 드루즈 궁병들은 수비에 크게 일조하였다. 1154년 누르 앗 딘의 다마스쿠스 점령 후 아미르 자흐르 앗 딘 카라마는 그에 복속하였다. 1157년 술탄은 카라마를 책봉하고 쇼우프와 베카 협곡 등 영지를 늘려주었다.[* 전쟁 시에 카라마는 다마스쿠스의 기병 40명과 거둘 수 있는 만큼의 세금을 가질 수 있었을 정도로 누르 앗 딘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카라마는 사르함무르(사르흐물) 성채를 근거지 삼아 해안의 십자군 습격에 나섰다. 상술하였듯 부흐투르 부족과의 지속적인 전쟁은 1166년 베이루트 영주가 도시를 국왕에게 매각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얼마 후 카라마가 사망하자 베이루트 영주[*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일 수도 있다.]는 그 장성한 세 아들들을 결혼식에 초대한 후 살해하였다. 그후 십자군은 지도자가 부재한 사르함무르를 공격해 파괴하였다. 카라마의 막내아들 자말 앗 딘 핫즈는 모친과 함께 사르함무르를 탈출하였고, 누르 앗 딘은 그에게 작은 영지를 내렸다.[* 한편 핫즈의 숙부 샤라프 앗 다울라 알리 역시 십자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아라문을 근거지로 삼으며 분가를 세웠다.] 한편 1187년 하틴 전투 후 베이루트에 접근하던 살라흐 앗 딘은 해안의 칼데에서 핫즈의 환영을 받았고, 그후 도시가 점령되자 핫즈는 가문의 복수를 완수했다고 여겼다. 살라흐 앗 딘은 부흐투르 가문의 가르브 지배권을 회복해주었다.[* 살라딘은 핫즈를 가르브의 7개 마을에 대한 아미르로 승인하였고, 이로써 부흐투르 가문은 중흥할 수 있었다. 살라딘의 사후 내전에서 패하고 살카드로 물러난 알 아프달은 핫즈와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다만 1197년 십자군이 베이루트를 재점령한 후 그 영주가 된 이벨린 가문은 배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전임자들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십자군을 불신하던 핫즈는 이벨린 가문과 어떠한 합의도 거부하였고, 1222년 다마스쿠스 아미르 알 무아잠 이사는 그의 영지를 확인하였을 당시 이벨린 가문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아이유브 왕조의 내전에 있어 부흐투르 가문이 다마스쿠스의 왕공 이스마일과 대립하던[* 나즘 앗 딘 무함마드는 아이유브 내전에 있어 앗 살리흐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를 노리던 (미래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지원 요청에 응하였다. 이에 1240년 이스마일은 가르브와 쇼우프를 십자군에 양도하였다.] 1242년 10월, 십자군은 베이루트 북쪽 케세르완에서 아미르 나즘 앗 딘 무함마드와 동생 샤라프 앗 딘 알리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핫즈 2세와 사드 앗 딘 키드르, 그리고 형제의 당숙 자인 앗 딘 살리흐가 공동 아미르가 되었다. 십자군의 중흥, 맘루크 왕조의 발흥과 몽골군의 침공 등 혼란의 시기에 그들은 모든 진영과 어느 정도의 우호를 맺는 중립 외교에 나섰다. 그 이중성에 분노한 시리아의 앗 나시르 유수프는 1255년 다마스쿠스 병력과 베카 계곡의 베두인들로 구성된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핫즈 2세는 아이타트(알레이)에서 그를 격파하였다. 그후 핫즈 2세는 십자군과의 우호를 강화하였다.[* 1256년 협조의 대가로 시돈의 영주로부터 베이루트 남쪽 다무르의 농경지를 할양받았다.] 한편 1259년 몽골에 복속했던 핫즈 2세는 이듬해 [[아인잘루트 전투]] 때에는 양 진영 모두에 파병하는 분산 투자[* 1259년 몽골군이 남하하자 핫즈 2세와 살리흐는 그 장군 키트부가에 복속을 표하여 가르브의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다만 이듬해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그들은 핫즈 2세가 몽골, 살리흐가 맘루크 측에 참전하며 승리한 측에 선 아미르가 상대방을 위해 탄원해주기로 하였다. 유례를 찾기 힘든 분산 투자 결과 살리흐는 술탄 쿠투즈를 설득해 핫즈 2세의 사면을 얻어내었고 부흐투르 조는 무사할 수 있었다.](?)로 위기를 넘겼고,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휘하에선 십자군에 대한 첩보 활동 등 그의 보조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럼에도 바이바르스는 여전히 부흐투르 조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았고, 그들은 외관상으로 순니 무슬림임을 드러내며 술탄의 호감을 사려했다. 1268년경 바이바르스는 세 아미르들을 트리폴리 백작과의 내통 혐의로 감금하였는데, 1278년 후임 술탄 바라카 칸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후에도 부흐투르 조와 베이루트 간의 친선은 이어졌고, 1280년 영주 음프헤는 베이루트 출신 망명자들 송환 및 가르브 주민들의 베이루트 공격을 자제시키는 대가로 살리흐에게 슈에파트 부근 농지를 양도하였다. 1288년 술탄 칼라운은 부흐투르 조를 포함한 레바논의 현지 족장들의 영지를 모두 압수하였고, 이듬해 트리폴리 정복 이후 그 할카(비맘루크 기병) 주둔군의 수입원으로 두었다. 당시 주요 아미르였던 키드르는 아들 나시르 앗 딘 후세인에게 지도권을 넘겼다. 1291년 베이루트 등 레반트 해안을 정복한 술탄 칼릴은 해안 방어의 주력을 이루던 산지의 노련한 농민병들이 전통적인 족장들 휘하에서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에 입각하여 부왕의 중앙집권화와 절충을 모색하였다. 1292년 술탄은 부흐투르 왕조의 영지를 일부 회복시키며 동시에 그들을 할카 부대에 편성하였다. 1294년 [[앗 나시르 무함마드]] 때에는 옛 영지 전부가 주어졌고, 이에 1299년 부흐투르 조는 3차 홈스 전투에서 패주하던 맘루크군에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이는 케세르완의 드루즈인들이 패잔병들을 공격해 약탈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