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사이파 vs 마안 가문 ==== [[파일:레바논 유수프 파샤.png|width=472]] 1600년경 유수프 사이파의 영지 쇼우프, 티브닌 등 내륙의 산지들과 아크레, 시돈, 베이루트의 항구에서 염세(鹽稅) 징세권을 지니던 [[파크르 앗 딘 2세]](파크렛딘)은 1593년 말엽, 다마스쿠스 총독 무라드 파샤에 의해 시돈-베이루트 산작 베이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법적으로 베이루트는 그의 관할에 있어야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수프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던 1598년 다마스쿠스 총독 세이드 메흐메드 파샤는 파크렛딘에게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수복하게 하였다. 베이루트 북쪽 나흐르 알 칼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파크렛딘은 유수프의 동생 알리를 전사시키며 승리하였고,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장악하였다. 다만 1년 후 유수프는 파크렛딘과 협상, 막대한 배상금을 대가로 두 영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1602년 베이루트-시돈에 더하여 사파드 태수에 임명되며 막대한 권력자로 부상한 파크렛딘은 1606년 반란을 일으킨 알레포 총독 알리 잔불라드가 유수프 휘하의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자 반군 측에 가담, 유수프로부터 재차 베이루트와 가지르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마안 가문의 영지는 베이루트 ~ 자파 해안에 이르러 13세기 초엽 예루살렘 왕국을 연상시켰다. 다만 이듬해 무라드 파샤의 진압군이 승리를 거두자 파크렛딘은 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처벌을 면하였다. 그 무렵 파크렛딘의 아들 알리가 부친 대신 시돈-베이루트 태수가 되었다. 한편 1600년을 전후로 토스카나의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십자군을 추진하며 레바논 산지의 마론파 기독교도들을 후원하였고 그들에 우호적이던 파크렛딘과도 접촉하였다. 토스카나인들은 그와 새 십자군 및 베이루트에서의 무역 특권 등을 논의하려 하였다. 이를 두차례나 거절하던 파크렛딘은 토스카나 측이 본래 잔발루드 반군[* 토스카나인들은 잔발루드 반군이 쇠락하기 전 그들과 십자군에 대한 지원 및 레반트 항구들에서 토스카나인들의 특권 등을 규정한 조약을 맺은 바 있다.]에 제공하려던 무기를 그에게 넘겨주자 협상에 응하였고, 1608년 장래의 십자군 지원을 대가로 군사 원조 및 유사시 망명지 제공 등의 조건으로 토스카나 대공과 조약을 맺었다. 한편 1611년 무라드 파샤의 죽음과 함께 파크렛딘은 포르테의 호의를 잃었고, 마침 유럽과 이란 전선이 모두 평온했기에 오스만 제국은 다시 레반트에 개입할 수 있었다. 신임 그랜드 와지르 나수흐 파샤는 파크렛딘에게 세크반 (용병 부대)를 해산하고 그가 요새화한 앗 샤키프(보포르)와 수바이바(님로드) 성채를 반환하도록 명하였다. 파크렛딘이 거부하자 다마스쿠스 총독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가 토벌에 나섰다. 파크렛딘은 한차례 반격에 성공하였으나 대군을 이끌고 온 아흐메드 파샤가 시돈 항구 등 교통로를 봉쇄하자 궁지에 몰려 해상 봉쇄에 나선 오스만 제독을 매수한 후 토스카나로 망명하였다(1613년 가을). 한때 파크렛딘과 동맹했던 사키파 가문은 오스만군의 샤키프 성채 함락을 도운 대가로 아흐메드 파샤로부터 베이루트와 가지르 영지를 하사받았다. 1614년 6월 포르테는 과거 아사프 가문의 견제를 위해 트리폴리 에얄레트를 세운 것처럼 시돈 에얄레트를 신설하여 마안 가문을 제어하려 하였다. 그 총독은 마안 가문의 수조권을 쇼우프 산지에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나수흐 파샤가 사망한 후 1615년 쵸엽 시돈 에얄레트는 해체되었고, 한때 시돈 총독에게 베이루트를 반환했던 사이파 가문은 재차 도시를 장악하였다. 얼마후 다마스쿠스의 아흐메드 파샤 역시 해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