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불안 속의 번영 ==== ||[[파일:레바논 정세 1774.png|width=410]]||[[파일:베이루트 지도.jpg|width=472]] || || 1774년 자히르 알 우마르의 영토 || 오스만 시대 구시가지 [[https://journals.openedition.org/mediterranee/11486|출처]] || 이로써 자히르는 베이루트 ~ 가자에 이르는 레반트 해안을 장악하였으나 1775년 오스만군의 토벌로 아크레에서 전사하였다. 우마르의 몰락 후, 그를 배신했던 제자르 파샤는 시돈 총독이 되었고 유수프는 베이루트, 슈우프, 비블로스, 베카 협곡의 영지가 주어졌다. 우마르를 토벌했던 오스만 제독 하산 파샤는 유수프에 대한 시돈 총독의 권력은 미리 핫즈 세금 징수에 국한되었음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1776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3년치를 미리 납부할 것을 명하고, 후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베이루트를 점령해버렸다. 이후 시하브 가문의 내전이 터지자 제자르 파샤는 누구든 자신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바치는 자를 지원하였고, 1778년 베이루트에서 출정하여 유수프를 비블로스에서 포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낸 후에야 철수하였다. 1783년 내전에서 패배한 유수프는 베이루트로 온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자르 파샤의 제안에 따라 도시로 향하였으나, 당도 직후 체포되어 아크레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유수프는 제자르 파샤에게 복위시 막대한 배상금 납부를 약속해 석방된 후 드루즈 산지로 돌아가 재집권하였다. 1788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약속 이행을 촉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르 파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맘루크들을 지원하였다. 맘루크 반란은 일단의 맘루크들이 제자르 파샤의 하렘과 간통한 것이 드러나 처벌당한 후 숙청이 가해진 것으로 촉발되었다. 베이루트의 마그레브 병력 지휘관인 알 자부리는 반군의 지도자인 살림을 죽이라는 제자르 파샤의 명을 거부하고 반란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아크레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군은 궤멸되었고, 이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 보복 원정을 가하여 베카 협곡 남부에서 그를 격파하였다. 1789년 9월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의 먼 친척인 마론파 기독교도 바시르 시하브 2세를 아미르로 옹립하였다. 유수프는 이듬해 재차 제자르 파샤를 설득해 권좌 회복을 노렸으나, 바시르 시하브의 요청에 의해 처형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후에 오스만 해군에 의해 베이루트에서 축출되었으나 곧 지위를 회복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를 제외한 다른 항구들처럼 휘하 맘루크들에게 도시를 맡겼다. 그의 지배기에 베이루트는 시돈, 티레, 라타키야, 트리폴리와 함께 아크레 다음가는 해군 기지였다. 농업과 무역의 성장으로 베이루트는 시돈, 아크레와 함께 번영하였다. 그중에서도 베이루트는 그의 근거지인 아크레 다음가는 도시였다. 1804년 제자르 파샤가 사망한 후 술레이만 파샤 알 아딜이 시돈 에얄레트를 얻었다. 그러던 1819년 그가 사망하자 제자르 파샤의 동맹이던 레바논 산지의 바시르 시하브 2세가 잠시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가 전 트리폴리 총독 무함마드 아가 바르바르가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한편 1820년대 시돈 총독이던 압둘라 파샤는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 시리아의 목화 수출을 독점하던 자신의 거점 아크레를 수입 또한 독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로 이어져 유럽 상인들은 아크레 대신 베이루트로 몰렸고, 프랑스 영사관 역시 베이루트로 이전되었다. 이로써 베이루트는 다마스쿠스의 외항으로서 기능하며 시리아 해상 무역에 있어 아크레의 독점을 깨고 몇년간 일대의 무역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만까지 줄어들었던 인구 역시 점차 회복되었다. 포르테, 드루즈, 맘루크의 세 파벌이 도시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던 1832년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군이 베이루트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이집트와 동맹이던 바시르 시하브 2세는 베이루트와 시돈 등의 수조권을 얻었고, 도시는 이집트령 레바논의 주도로 중시되었다. 1840년 오스만 제국은 영국 등의 도움과 함께 반격에 나섰고, 찰스 네피어 휘하의 영국 함대는 8월 11일 베이루트 앞에 나타났다. 도시의 영국 공사 리처드 우드는 바시르 시하브 2세에게 이집트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설득하였다. 다만 아미르는 레바논에 이미 3만에 달하는 이집트군이 주둔 중이고, 프랑스 영사로부터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 육로로 진군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후였기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도움은 외교적인 것에 그쳤다. 영국 측은 메흐메드 알리가 임명한 총독 술레이만 파샤에게 도시를 포기하고 시리아를 떠나라 통보하였고, 주민들은 이집트 주둔군에 반기를 들었다. 다만 1만 5천에 달하는 이집트 병력에 비해 소규모였던 영국 함대는 스토포드 제독의 본 함대와 합류한 후에야 9월 11일 도시를 포격하고 1천 5백의 오스만 병력 등을 베이루트 북쪽 주니에에 상륙시켰다. 오스만 측에 가담한 바시르 시하브의 사촌 바시르 카심 등 일부 드루즈 군대도 그에 합류하였다. 격전 끝에 9월 25일 베이루트는 거의 장악되었고, 10월 3일 이집트군은 철수하였다. 8일 후 바시르 시하브는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였고, 바시르 카심이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바시르 시하브는 포르테에 4백만 피아스터를 내고 프랑스에 망명하려 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런던과 몰타의 선택지 중 후자를 택하였다. 그는 150여명의 가솔들과 베이루트를 떠났고, 이듬해 시하브 가문이 축출되며 드루즈 산지는 내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몰타에서 11개월간 지낸 후 포르테의 사면을 받은 바시르 시하브는 이스탄불로 이주해 1850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