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고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베이루트 로마 포럼.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베이루트 로마 욕탕.png|width=100%]]}}} || || {{{#000000 {{{-1 베리투스 포룸 유적.[br]로마 시기 도시에는 거대한 공공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세워졌다.}}}}}} || {{{#000000 {{{-1 로마 [[목욕탕]].}}}}}} ||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중흥기는 후자가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반란으로 사망하며 종식되었다. 5년 후 적법한 계승자인 데메트리오스 2세가 발라스를 죽이고 집권하였으나, 그 역시 여론의 분노를 샀다. 그러자 이듬해 발라스의 장군이던 디오도투스가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크를 장악하고 발라스의 4세 아들을 안티오코스 6세로 즉위시켰다. 다만 얼마후 안티오코스 6세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디오도투스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기원전 140년 디오도투스는 그중 하나인 비루타를 파괴하였다. 다만 2년 후 데메트리오스 2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7세가 디오도투스를 격파하며 연이은 10년의 내전은 진정되었다. 파괴되었던 도시는 아마 안티오코스 7세의 치세에 페니키아의 라오디케아(Λαοδίκεια ἡ ἐν Φοινίκῃ)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셀레우코스 왕들은 보통 자신이 세운 도시에 직계 가족의 이름을 붙이는데, 안티오코스 7세의 어머니 이름이 라오디케아였다. 그리고 그후 셀레우코스 조에 라오디케아란 이름을 가진 왕비는 나오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7세의 형제이자 그의 사후 복위한 데메트리오스 2세 역시 후보로 제시될 수 있으나 그의 두번째 치세는 4년으로 짧았고, 내전으로 얼룩졌다.] 다만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시리아의 라오디케아([[라타키야]])와 구분하기 위해 '가나안의 라오디케아'로도 불렸다. 당시 그리스식으로 건설된 장방형의 도시는 현재까지 베이루트 구도심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조는 쇠퇴하였고, 혼란에 지친 시리아 인들의 초청으로 기원전 80년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일대를 장악하였다. 베이루트는 그의 직접 지배령이었고 아르메니아령 페니키아의 치소였다. 다만 이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시리아와 페니키아는 기원전 64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