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루트 (문단 편집) ==== [[로마법]]의 중심과 몰락 ==== [[파일:베이루트 깃발.gif|width=500]] >Berytus Nutrix Legum (베이루트, 법들의 어머니) >ㅡ 3세기 도시를 상징하는 라틴어 경구. 현재까지도 도시 문장에 아랍어 번역문[* بيروت أم الشرائع]과 함께 적혀있다. 동로마 시대의 베리투스는 학문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번영을 이어갔다. 4-6세기 도시의 양대 정체성은 법학과 기독교로 대표되었고, 양측이 학문적으로 혼재한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베리투스 법학교였다. 베리투스에 법학교가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고, 아우구스투스부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까지 학자들 간의 이견이 분분하다. 그 위치 역시 불분명하다. 로마식 교육 시설인 오디토리아는 신전에 딸린 공립 도서관 옆에 지어졌는데, 전형적인 로마 도시 구조를 따른 베리투스에서도 마찬가지였고 5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학교가 '하나님의 성전' 옆에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엽 성 요르요스 성당들 (정교회 / 마론파) 사이의 시장을 발굴한 결과, 5세기 법학교 교사 파트리키우스의 묘비석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성 요르요스의 전신인 비잔틴 시기 아나스타시스 성당 부근에 법학교가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239년 [[니카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에 의해 언급되었을 때에 이미 베리투스 법학교는 제국의 주요 법학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3세기 [[세베루스 왕조]] 시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학자이자 현지 페니키아 출신인 파피니아누스와 울피아누스가 그곳에서 강의하였고, 베리투스 법학교 출신 변호사들과 법관들이 동방 속주들을 중심으로 제국 전역에서 기용되었다. 베리투스 법학교의 성장은 도시가 동방 속주들에 대한 로마 황제들의 칙령 보관소였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수도에서 작성된 황제의 칙령들은 베리투스에 당도한 후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표된 후 보관되었다. 이러한 기능은 서기 196년 처음 기록되었는데, 후에 보관소 부근에 세워진 법학교의 학생들은 최신 칙령들을 공부 교재로 삼을 수 있었다. 이는 베리투스 법학교가 [[카이사레아]]나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 등 다른 동방 도시의 법학교들이 지니지 못한, 차별화된 장점이었다. [[파일:베이루트 동전.jpg|width=600]] 베리투스 유적에서 출토된 [[카라칼라]] 황제의 동전 3-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베리투스 법학교 학생들에게 고향에서의 각종 의무를 면제해주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4세기 그리스인 연설가 리바니오스는 베리투스 법학교가 유복한 가문들의 젊은 학생들을 끌어모은다고 기록하였고, 동시에 (그리스 문화권인데도) 교육상 라틴어가 쓰이는 것에 개탄하였다. 다만 4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셀레우코스 왕조에 이은) 2차 헬라화와 함께 도시의 주언어는 점차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대체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베리토스(Βηρυτός)로 불렸다. 한편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베리투스를 대주교구에 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로 승격시켰고, 티레 관할이던 6개의 교구를 그 산하로 이전시켰다. 다만 이듬해 [[칼케돈 공의회]]에서 6개의 교구는 다시 티레 대주교에게 반환되었나 메트로폴리스 직위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베리투스의 주교는 티레 대주교를 거치지 않고 안티오크 총대주교의 직접 관할에 놓였다. 5세기 무렵 베리투스 법학교는 제국의 법학교들 중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 교사들은 '교회의 스승들'로 일컬어질 만큼 존경받았고 동방의 법학 교육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425년 콘스탄티노플 법학교가 그의 주요 경쟁 상대가 되었고, 두 학교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카이사레아의 법학교들을 폐쇄한 후 제국의 유일한 법학 교육 기관으로 유지되었다. 전통적으로 정의의 집행자였던 로마 황제는 권력의 기반으로써 법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그중에서도 법학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유스티니아누스는 베리투스 주교와 티레의 총독, 그리고 그 교사들에게 학교의 규율 유지를 당부시켰다. 25세 이전에 4년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는 기존 제도가 5년제로 고정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것이었다. 5년 간의 학부 과정은 고전 법학 문서들과 제국 법령들에 대한 검토와 분석 및 판례에 대한 논의로 구성되었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법대전]] 편찬에 나설 당시 상당 부분이 울피아누스 등 베리투스 법학파에서 유래되었다. 이렇듯 베리투스 법학교는 테오도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에 걸쳐 진행된 로마법의 성문화가 준비된 산실이었고,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를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제국의 3대 법학교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551년 7월 9일, 페니키아 해안 도시들은 강한 지진으로 파괴를 겪었다.[* 이 지진으로 내륙의 헬리오폴리스의 신전군 역시 파괴되었다] 그중 베리투스에는 지진에 이어 해일까지 덮쳐 법학교를 포함한 시가지가 초토화되었고, 그 결과 각지의 학생들을 포함한 3만여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도시 재건을 위해 예산을 할당하였고, 법학교는 임시로 [[시돈]]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최고의 교사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그리고 560년, 베리투스에 이번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재건이 한창이던 도시에 이는 결정적인 타격이었고, 제국의 경제난과 함께 다시 재건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생존자들마저 기독교 교리 해석을 두고 대립하였고, 635년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었을 당시 동로마령 베리토스는 고작 마을 규모로 전락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