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징시 (문단 편집) === 북방 왕조들의 수도 === [[파일:노구교.jpg]] [[금나라]] 대에 중도의 서쪽, 영정하(永定河)에 놓인 노구교 역사적으로도 중국 왕조들의 북방 요충지였던 계현은 [[전연]]과 [[후연]]의 수도를 지냈다.[* 전연, 후연, 북연은 모두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모용선비가 중심이 되어서 세운 나라들이다.] [[수나라]] 건국 후에는 범양(范陽)으로도 불린 남쪽의 탁군([[줘저우]])가 더욱 중시되었으나, [[당나라]] 대에는 다시 계현이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허베이 지역은 종종 기존 지명들을 합한 연계(燕薊)라 불렸다. 수-당대에도 몇차례 연왕이 봉해지기는 했으나, 이미 주현제가 정착한 후였기에 -국이 붙지 않고 허베이도(河北道) 유주(幽州)로 이어졌다. 8세기 전반 계현은 [[당현종]]이 창설한 천보 10 절도사 중 범양(혹은 유주) 절도사의 치소가 되었고, 744년 평로([[차오양시]]) 절도사 [[안록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하동([[타이위안]]) 절도사까지 차지한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키며 대연 황제를 칭했다. 안사의 난(755 ~ 763년) 이후 평로 절도사는 [[산동]]으로 이전되었고, 범양 절도사는 노룡 절도사로 개칭되었다. 9세기 들어 절도사들의 독립성이 강화되자 노룡 절도사는 연국공(燕國公)을 제수받고 직위를 세습하는 등 군벌화되었다. [[오대십국]]기인 911년에는 노룡절도사 유수광이 칭제하여(마지막) [[연(오대십국시대)|연나라]]를 세웠으나, 911년 [[후당]]에게 멸망했다.[* 이 연나라(유연)는 존속 기간이 너무 짧아 오대십국에 들지 못한다] 그 무렵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936년(후당 멸망의 대가로) [[후진]]의 [[석경당]]에게서 [[연운 16주]]를 할양받았고, 그중 당시 연주로 불리던 베이징을 5경 중 남경 석진부로 삼았다. 요의 수도는 내몽골의 상경 임황부였지만, 남경은 경제 중심지로써 중시되었다. 한편 [[송나라]] 대에도 몇 차례 연왕이 봉해지긴 했으나, 이미 그 중심지인 연운 지역이 거란의 영토였기에 유명무실 했다.[* [[송태조]]의 아들 [[조덕소]], [[송태종]]의 아들 [[조원엄]]이 연왕에 추봉되었고 [[송신종]]의 아들 조우가 연왕에 봉해졌다] 1121년 [[금나라]]의 공격에 상경과 중경을 상실한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서쪽 변경의 응주로 도주하자, [[야율대석]] 등 요나라 잔존 세력은 남경 석진부를 중심으로 연운 16주 일대에 [[북요]] 정권을 수립했다. 북요는 [[북송]]의 환관 [[동관(북송)|동관]]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격파했으나, 내분으로 야율대석이 떠난 후 금나라에 정복되었다. 따라서 1120년 해상 맹약과 달리 연운 16주 일대는 북송이 아닌 완안부 여진의 금나라가 차지하게 된다. 금나라는 맹약에 따라 베이징을 송나라에 반환했으나 백성들은 모두 끌고 간 채 빈 땅을 송에 할양했고, [* 금의 입장에서는 송나라가 전쟁에서 기여한 것이 없다시피 해서 온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무찔렀으니 백성은 빼고 땅만을 송나라에 준 것도 대승적인 양보였지만 송나라에서는 이에 관해 불만이 컸다.] 이듬해 송나라의 배신으로 금과 송의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은 다시 금나라에 정벌되었다. 금나라가 북중국 일대를 장악한 이후 금나라는 요나라의 남경이 있던 베이징에 역시 5경 중 하나인 중경 대흥부(中京大興府)를 설치했다. 본래 [[만주]]의 상경 회녕부를 수도로 삼고 있던 금나라는 [[해릉양왕]]이 한화 정책 및 화북 지배 공고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여진족 귀족들의 텃세가 강한 만주에서 화북으로 중심지를 옮기는 것]를 위해(1151년부터 공사한 후) 1153년 중경으로 천도, 중도(中都)라 명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