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벼 (문단 편집) === 재배사 === 쌀에 대한 언급이 있는 문헌들, 예를 들면 《[[산해경]]》 같은 서적을 보면 동양에서 쌀은 오래전부터 단순한 식량의 위상을 넘어 제례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곡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사를 지을 때 쓰는 떡이나 술, 식혜 등등은 모두 쌀을 사용해 만드는 제물이다. 지금의 인식과는 달리 고대 이래 술을 빚은 가장 큰 목적은 사람이 음용하기보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고[* 중국에서 일반인들이 널리 음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최소한 후한 시대 이후이다.], 동양권에서 제사에 쓰는 술은 대부분 쌀로 빚었다.[* 검은 [[수수]]로 빚은 술을 제사 때 쓸 수 있는 [[구석#s-2|천자만의 특권]]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쌀의 재배는 이러한 제사문화와 그 역사를 함께 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며, 서양에서의 포도 재배와 신앙 문화와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벼 유통기한은 약 1년에서 3년인데, 겉껍질을 벗기지 않은(도정하지 않은) 벼는 3년을 버틸 수 있고, 도정한 후의 쌀은 1년을 넘기기 어렵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며 가치가 하락하고(햅쌀밥과 묵은쌀 정부미 밥 먹어보면 알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를 악용하기도 했다. 창고에 쌀 100석이 있으면 햅쌀 100석을 삥땅치고 묵은 쌀 100석을 채워 서류상으로는 같은 쌀 100석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현물화폐의 단점이다. 보관기간이 길다보니 화폐이자 축재 수단이자 교역품으로 쓰였다. 천석꾼이나 만석꾼 등의 단어는 물론, 창고에서 쌀이 썩어간다는 말은 금고에 쌀을 쟁여둔 것이고, 동아시아권의 선박 체급을 표현할 때 100료, 100석 등을 쓰는데 이것이 쌀 수송량을 의미한다. 유럽권에서는 포도주 수송량이 이에 해당했으니 서로의 주요 무역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앙법]]이 퍼지기 전에는 일반적인 작물처럼 [[직파법|직접 씨를 뿌려 재배]]했으나, 수리 시설이 널리 퍼지면서 가뭄에 대한 대비가 어느 정도 된 후에는 이앙법을 이용해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앙법 자체는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으나, 가뭄에 의한 피해가 너무 크고 벼를 이양하고 물이 반드시 필요할 때 물을 대지 못하면 한 해 농사가 통째로 망해버리는지라 조선 전기까지는 국가 정책으로서 금지하였다.[* 조선 전기까지는 현재보다 강우량이 적었다고 한다.] 후기에는 아예 금지하는 감독은 느슨해지고 제방과 저수 설비를 관리하는 쪽으로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 다만 벼도 천상 수중식물이 아니라 육상식물인지라 [[논]]보다는 [[밭]]에서 키우는 것처럼 재배하는 게 생육에 더욱 긍정적인 편이다. 물속에 잠긴 채로 성장하면 뿌리 쪽은 호흡도 어렵거니와 물 속의 부패균에 저항하는 면역력을 유지하는데 힘이 많이 빠지기 때문이다. 물론 밭에서 키우는 벼와 논에서 키우는 벼들(논벼)은 다른 계통의 품종이며, 밭에서 키우는 벼는 따로 밭벼라고 부른다. 원래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농업용수를 끌어오려면 토목공사를 크게 해야하는 등 많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밭에서 벼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밭에서 키우면 되려 잡초가 더욱 흥해서 제초작업에 손이 매우 많이 가는데다, 밭벼는 인디카처럼 찰기가 적어 [[한국인]] 입맛에 맞지도 않는다. 현재도 밭벼를 심는 곳은 대개 제주도같이 물이 부족한 곳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모내기를 통해서 논에다 이앙하여 경작한다. 농업 기술과 품종의 발달로 현대에 들어와서 벼는 2기작은 물론 3기작까지도 가능하지만 [[동북아시아]]는 겨울이 추우므로 일부 지역[* 남중국, 대만, 오키나와, 규슈 남부 등]을 제외하면 3기작은 커녕 2기작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열대 기후]] 지역에서는 생육에 유리한 기후 덕에 베고 나면 또 자라므로 2기작은 물론 3기작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함흥평야 이북에서 벼를 재배하는 건 엄청난 일이었지만, 후기에 들어서 [[만주]]까지 [[한계선|재배 한계선]]이 올라갔다. 이앙법은 모의 생육이 느려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고, 다른 곳에서 밭벼 파종하듯이 미리 볍씨를 뿌렸다간 서리를 맞아 죽기 때문에 날이 풀리는 즉시 재빨리 갈아엎은 후 재빨리 심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고, 이를 위해 꼭 필요해서 들여온 농사용 [[소]]마저도 기후 적응을 제대로 못해 고생했다고 한다.[* 원래 이런 기후는 벼보다는 메밀이나 감자를 재배하는 것이 훨씬 낫다.] 대개 이런 기후는 일조량 문제로 생육기간이 짧은데 그 말은 그 짧은 시간에 파종, 제초, 수확 등등 농사에 필요한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기계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농민들에게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조선족]] 농부들이 최북단 벼농사 기록을 경신한 바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혼란기에 조선/한국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기후가 벼농사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던 동북3성의 벼농사 개발을 주도하였다.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을 먼저 개척한 후, 1933년에는 아무르강에서까지 벼를 키우면서 지으면서 세계 최초로 북위 50도 이북에서 벼농사에 성공했다. 1934년 당시 조선족은 동북3성 인구의 3.3%에 불과했지만 벼 생산력의 90.1%에 육박했다.[* Jin Binggao (金炳镐); Xiao Rui (肖锐) (2011). 《中国民族政策与朝鲜族》][* 다만 이 당시에는 조선족보다는 '한인' 등으로 불렸다.] 논처럼 화분에 흙과 물을 가둬두고 적절히 물을 갈아주면, [[화분]]에도 벼를 키울 수 있다. 다만 화분에 재배하는 특성상 수확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서울특별시]]나 [[대구광역시]] 등 일부 대도시에선 이런 벼 화분으로 도심 녹화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벼를 말릴 때 낱알만 분리해서 바닥에 깔아놓는 방식을 취하며[* 가을철 시골에 가면 '''길가에 떡하니''' 벼를 말리려고 깔아놓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이렇게 하는 농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건조기가 보급되면서 이런 식으로 말린 벼는 농협에서 매상을 거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짚단째로 걸이대에 걸어서 말린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Ine_karita.jpg|이렇게]] 줄기 부분은 볏짚, 볏단[* 벼+[[사이시옷]]+단(繵, 묶을 단)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지푸라기라고 하는데[* 지푸라기는 단수, 짚은 복수형으로 짚 자체는 곡류의 줄기를 뭉뚱그려 부르는 단어이다. 밀짚모자의 밀짚은 밀의 마른 줄기로 만든 모자라는 뜻.] 이쪽도 쓸 데가 많았다. 여물이라고 해서 가축들의 먹이로 쓰이며, 돗자리, 모자, 비옷 같은 걸 짜기도 한다. 또한 꼬아서 새끼줄을 만들때 쓰고, [[초가집|지붕에 얹기도 하며]], 태워서 모기 등 해충을 쫓는 용도로도 쓰이고[* 벼 줄기는 물기가 많아 볏단을 태우면 1년 이상 묵힌 지푸라기라도 수증기와 연기가 매우 많이 나온다.], 심지어 썩혀서 비료로 쓰기도 하는 등등. 짚에 붙어 사는 [[고초균]]이 [[발효]]를 돕기 때문에 장을 담그기 위한 [[메주]] 만들 때에도 짚이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