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인양요 (문단 편집) === 결말 ===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함정 2척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병사]] 150명과 함께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이 빠르게 사격하여 [[전사]]자 3명[* 최장근(崔長根)ㆍ김달성(金達城)ㆍ오준성(吳俊成)]에 [[부상]]자 2명을 내었다. 조선 군대는 후퇴하고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0~ 60명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 측 기록엔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3명 발생했다고 쓰였다. 여기서 조선군은 뒤에 있는 정족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성벽 뒤에 매복했다가 적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일제히 사격을 퍼붓는 단순한 전략을 사용했다. 이토록 단순하고 똑같은 전술에 2번이나 당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 해군은 어리석었고 조선군을 매우 만만히 봤다.], 조선군 스스로도 자신들이 총을 쏘자 프랑스 군인들이 그냥 엄폐하였는지, 부상당했는지 아니면 사망했는지도 가늠하지 못하였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는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분노하여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보|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선박|배]]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를 비롯한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방화로 무력화 시켰다. 또한 용진진, 갑곳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철곳보, 월곳진을 비롯한 성곽과 요새, [[돈대]], 관청, 창고, 장대. 심지어 국왕이 머무는 [[강화행궁]]에도 불사르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의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장병 60명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 점거하라고 병력을 보냈는데, 양헌수가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해 [[수병]]을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프랑스 외 여러 서양열강들의 기록엔 프랑스 측 부상자는 35명이라고 쓰였다. 조선과 프랑스 양측 다 서로 자존심 싸움 때문에 자군의 피해기록을 약간 축소하거나 전과를 약간 과장했던 듯하다.]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프랑스군 전사자를 40명 남짓 목격했다고 주장했다.[[양헌수]]가 쓴 병인일기에 따르면 진시(8시)에서 미시(14시)까지 계속된 전투에 조선군의 탄약이 바닥났을 무렵 때마침 프랑스 해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에 [[술]]과 [[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 그 때문에 [[견인포|야포]]를 챙겨 가지 않았다. [[http://cfile206.uf.daum.net/image/11051E084943F14000D07D|이 링크]]로 가서 정족산성 전투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격 측이 성문을 공격하기 몹시 불리한 구조이다. 야사에 따르면 [[프랑스 해군]]이 버리고 간 [[와인]]과 음식은 조선군이 챙겨서 먹었다고 한다.]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로즈 제독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하곤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다.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조선과 프랑스의 전쟁은 예상을 벗어나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하진 않았다. 자신들 입장에선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변방 깡촌의 소국에게 패배했다는 점에 참가했던 프랑스 해군 병졸들은 격분해 로즈 제독에게 설욕전을 하자고 청했으며,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속국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에 적극적이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다. 이후 로즈 제독은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지만,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