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슈냐크인 (문단 편집) == 보슈냐크인 민족주의 == >"Neuk i neobaviješten čovjek često brka pojmove Bošnjak, Bosanac, Musliman, Bosanski Musliman, musliman. To je pretežno onaj naš sloj i soj koji nije razvijao u sebi nikakve pojmove o vjeri i naciji. To je onaj soj u kojeg nema pojmova o općem već samo o vlastitom." >---- >"무지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보슈냐크인, 보스니아인, 민족으로서의 무슬림, 보스니아 민족으로서의 무슬림, 일반 무슬림이라는 용어를 종종 혼동합니다. 대부분 우리의 사회적 계층과 혈통이라는 건 종교와 국민에 대한 어떤 생각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이 혈통이라는 건 보편 개념이 아닌, 단지 그 자신일 뿐입니다." >---- > 알리야 이사코비치(Alija Isaković, 1932–1997) 보슈냐크인 부유층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1697년 [[사라예보]]가 공격당하는 곤경을 치루며 많은 재산과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보슈냐크인들은 오스트리아군과 주도적으로 맞서 싸우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부조리 혹은 개혁에 반발해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1831년부터 1833년까지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제 개혁에 분개한 보슈냐크인 엘리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적도 있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보슈냐크인들은 자신들이 서구인들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 튀르크인들과 똑같지는 않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게 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문서 참조.]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진입하자 보스니아의 오스만군과 보스니아 민병대가 맞서싸웠으나 패배하고[* 17세기만 해도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가 전사자 교환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스트리아 군이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는 과거 [[예니체리]] 시절에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 보슈냐크인 인구 3분의 1에 달하는 20만여 명이 오스만 제국의 다른 영토로 피난을 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점령 이전에는 소규모의 [[립카 타타르인]]들을 제외하면 무슬림 신민들을 다스렸던 경험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보스니아를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와해시킬 수 있는 적법한 모델로 보고 성공적인 지배를 위해 상당히 의욕적으로 임했으나, 현지인들의 반발과 당국의 실책으로 인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스니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다르게 근대화, 산업화가 상당히 지체되었다. 1883년부터 1920년 사이에도 5만여 명 이상의 보슈냐크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를 떠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동관리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은 1908년부로 완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슈냐크인 인구의 추가 유출이나 소요 사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1909년부로 무슬림 행정기구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당시에도 보스니아의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일부러 [[오스만어]]를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동시에 보스니아 민족주의자 이반 프라뇨 유키치(Ivan Franjo Jukić, 1818–1857)의 사상이 재발견되면서 세속적인 교육이 확대되고 새로운 지식층이 출현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에서 종교적 정체성과 종족적 정체성이 혼합된 보슈냐크인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아랍 문자, 범슬라브주의에 동조한다는 의미에서 [[키릴 문자]]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당시 보슈냐크인들은 몬테네그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된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신민이 되었으며,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도 유지되었던 보슈냐크인 지주층 상당수가 토지 개혁으로 시가보다 더 적은 보상을 받고 토지를 내놓아야 했다.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뒤,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보슈냐크인들에게 세르비아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흡수되었다. 2차대전 와중에는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체트니크]] 사이에서 수만여 명의 보슈냐크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제13무장산악사단]]의 사례처럼 나치 독일에 부역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처럼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1280487.jpg|width=100%&align=center]]}}}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osnian_Muslims_pray.jpg|width=100%&align=center]]}}} || || [[스레브레니차 학살]] 추모 시위를 하는 [[북마케도니아]]의 보슈냐크인들 || 스레브레니차 학살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보슈냐크인들 || 이후 벌어진 정황 및 갈등에 대해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문서와 [[보스니아 전쟁]] 문서 참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치하에서는 보슈냐크인 가운데 제말 비예디치(Džemal Bijedić, [[1917년]] [[4월 12일]] ~ [[1977년]] [[1월 18일]]), 함디야 포즈데라츠(Hamdija Pozderac, [[1924년]] [[1월 15일]] ~ [[1988년]] [[4월 7일]]), 라이프 디즈다레비치(Raif Dizdarević, [[1926년]] [[12월 9일]] ~)와 같은 고위 정치인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세르비아인 무슬림, 코소보인 무슬림인 [[고라인]], 마케도니아인 무슬림인 [[토르베시인]]들과 한데 묶여 단순히 무슬림(Муслимани / Muslimani)으로 분류될 정도로 연방 내에서의 위상은 낮았다. 이후 발흥한 보슈냐크인 민족주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을 통해 슬라브계 무슬림 민족 보슈냐크인이 겪은 격변의 근현대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슈냐크 민족주의 대신 자국 내 거주하는 모든 국민들을 [[보스니아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