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테르 (문단 편집) == 생애 == 볼테르의 아버지는 부유한 공증인[* 공정증서의 작성 및 사서증서에 대한 인증 등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이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어릴 때부터 파리의 유서 깊은 예수회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상류 사회에 소개했고, 동창들 덕에 귀족들과 어울렸다. 또한 볼테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치가 있었기 때문에, 12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재주를 인정받기도 했다. 20살에는 당시 유명한 사교계 모임인 르 탕플({{{-1 ''le Temple''}}})에 출입하면서 당대의 많은 자유사상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1년 뒤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시작했을 때, 그가 지은 시구가 문제가 되어 [[바스티유 요새|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투옥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라는 별것 아닌 구절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테르는 감옥에서도 비극 《오이디푸스 ({{{-1 ''Edipe''}}})》의 초고를 집필하였고, 출옥 후 공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아루에'라는 자신의 성(姓)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726년, 30살 때 일찍 성공을 하여 거칠 것이 없었던 볼테르에게, 귀족 청년 슈발리에 드 로앙[* 슈발리에 드 로앙의 본명은 '기 오귀스트 드 로앙-샤보'([[https://fr.wikipedia.org/wiki/Guy-Auguste_de_Rohan-Chabot|Guy Auguste de Rohan-Chabot]])이다.]이 볼테르를 ‘성(姓)도 없는 부르주아’라고 빈정대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볼테르는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사실 '아루에'라는 본래의 성(姓)은 그 당시로 치면 평민 느낌이 나는 성(姓)이어서, 귀족 느낌이 나는 필명 '볼테르'로 자신의 성(姓)을 바꾼 것.]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고, 화가 난 귀족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몽둥이찜질을 퍼부었다. 이에 분개했던 볼테르는 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감히 귀족에게 도전장을 던진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당시만 해도 굳건하던 신분사회 속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모두 그 귀족 편을 들었고, 그 바람에 볼테르는 또다시 바스티유에 갇히게 된다. 이미 한 차례 수감 생활을 경험한 볼테르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청원하였고, 한동안 [[영국]]에 가서 있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영국으로 향하는 망명길에서 볼테르가 귀족계급의 횡포에 대해 곱씹은 울분과 분노가, 이후 그의 계몽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의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던 볼테르는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었고, 일찍부터 은행가들과 교분을 쌓고 투자와 대출 사업에 참여해 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볼테르의 영국 생활은 망명이나 다름없었지만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시기에 볼테르는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카페에 드나들었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선 스위프트|스위프트]]와 교류하였으며,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과학자 [[뉴턴]]의 책에 열광하기도 한다. 1728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에 영국에서의 경험들을 엮어 《철학 편지》를 발표했고, 검열당국에 의해 "종교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가져다줄 방종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으로 지정되어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뒤 샤틀레 부인({{{-1 ''Madame du Châtelet''}}})의 영지로 도피하여 이때부터 10년간 숨어지냈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있던 물리학자이기도 했고, [[아이작 뉴턴|뉴턴]]의 이론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부인은 볼테르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볼테르는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서 만난 친구 다르장송의 추천으로 국왕의 사료편찬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볼테르-샤틀레 커플은 파리로 돌아와 파리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Sceaux)에 자신들의 궁정을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임신한 샤틀레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홀로 남게 된다. 볼테르는 전에 프러시아 왕의 초대를 받았던 일을 생각해내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1750년 [[프로이센 왕국|프러시아]]의 [[포츠담]]으로 떠났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왕]]에게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받았음은 물론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를 무척 흠모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 그의 초청으로 볼테르는 프로이센에 3년간 머물렀다. 하지만 둘다 성격이 쎈 편이라 다툼이 자주 일었고 얼마 안 가 그곳을 떠난다. 그럼에도 평생 서신을 교환하면서는 지냈는데, 서신을 읽어보면 과연 이 사람이 왕인가 싶을 정도로 프리드리히의 마음이 느껴진다.] 볼테르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왕이 프랑스어로 시를 지으면 그것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대가로 2만 리브르(약 8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성격 차가 컸던 두 사람은 3년 후 결별한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볼테르는 이미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754년 국경 너머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델리스(délice: 열락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집을 짓고는 거기서 살았다. 극장도 지어 연극을 공연하고, 비서와 요리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누렸다.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를 출간하고, [[드니 디드로|디드로]]가 주도한 《백과전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의 대표작 《[[캉디드]]》가 쓰여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다만 이 시기의 제네바 공화국은 칼뱅주의 하에 연극 등의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제네바 시민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1758년에는 제네바에서 조금 떨어진 프랑스 영토인 투르네와 페흐네에 토지를 사들여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국경 근처라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도망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볼테르의 말이기도 했다. 페흐네는 당시 인구가 50명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었으나, 볼테르가 이곳에 직물 공장과 시계 공장을 세우고, 제네바 공화국에서 빠져나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정착시켰으며, 훗날 20년 후 볼테르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인구가 1200명으로 늘어있었다.[* 페흐네는 볼테르 사후인 1791년 개칭하여 페흐네-볼테르(Ferney-Voltaire)라는 이름을 가진 인구 1만이 조금 안 되는 규모의 [[코뮌]]으로 현존한다.] 페흐네에 진영을 구축한 볼테르는, 이성과 문명을 옹호하며 부당한 권력과 종교의 광신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지성의 투사 역할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칼라스 사건이 대표적인데, 개신교도인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일이 발생했다. 소문에 의한 명백한 누명이었지만 판사들은 칼라스가 개신교라는 이유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억울하게 묻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볼테르는 광신이 빚은 비극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고등법원의 사건기록을 입수해 분석하고, 칼라스 가족을 도와 국왕의 재판정에 상고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이 문제에 관한 팸플릿을 써서 주변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는 등 일련의 노력을 통해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3년 뒤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이끌어냈다. 1763년에 발표된 《관용론》이, 이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다. 1778년 무렵,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84세가 된 볼테르가 장장 28년 만에 프랑스로 귀환할 때,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들어왔다고 하며, 이를 전해들은 [[루이 16세]]가 질투심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 따른 피로와 연일 이어지는 환영행사를 이겨내지 못하고 석 달이 못되어 숨을 거뒀다. 사후 프랑스 혁명기에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을 모시는 [[팡테옹]]에 두번째로 안치되었다. 하지만 판테옹에 첫번째로 안치된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미라보 백작]]의 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팡테옹에서 철거당했기 때문에, 볼테르는 프랑스의 모든 위인 가운데서도 첫번째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를 두고 '프랑스는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