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건제 (문단 편집) === [[일본]] === 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 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농업)|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고쿠시)로서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제후국)|번]]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대신 일본의 봉건제가 유럽처럼 쌍무계약의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봉건제 당시 유럽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물론 실질적인 석고는 조금 달라서 예시를 들면 대마도는 실제 석고는 1만이 안 되었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암해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고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냈기에 마찬가지로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이 외에는 많은 번들이 개간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실제 석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심지어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공식 석고보다 실제 석고는 3배 가까이 되었을 정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군현과 더불어 사용되었는데, 이쪽은 정반대로 기존 정치구조를 "봉건"으로 칭하고 "군현"을 추구해야 할 새 정치제로 보았다. 이는 쇼군 하 다이묘로 권력이 분화되었던 점을 봉건에 대입하고, 근대 유럽의 중앙화 국가를 군현에 대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심상은 "[[폐번치현]]"을 비롯한 관련 용어에도 반영되었다. 중세 유럽의 공후백자남의 작위가 실제 그 영토의 넓이나 부유함, 영향력이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큰 관계는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고 중국 역시 주나라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작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은나라의 후신이라 공작 칭호를 받은 상나라나 이민족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국토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남작 칭호를 받은 초나라처럼 실력과 등급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고 예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는 어느 시대에서나 명목상의 "격"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에도 시대의 경우 실제 석고의 차이가 난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지만 1번의 번주로 인정받는 다이묘는 석고가 얼마든지 간에 같은 "격"으로 인정받는 한편, 실제 석고나 영행력이 아무리 높아도 다이묘가 아닌 다이묘의 배신이나 하타모토들은 그저 "사무라이"일 뿐이었다. 따라서 예우, 결혼 등에서 엄격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를 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