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가티 (문단 편집) === Automobiles Ettore Bugatti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토레 부가티.jpg|width=100%]]}}}|| || {{{#000,#fff '''부가티 창업주 에토레 부가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rkwardlimousine.jpg|width=100%]]}}}|| || {{{#000,#fff '''부가티 타입 41 루아얄 파크 워드 리무진'''[*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고 비쌌던 리무진 이라고 불리었다. 약 2,000만 달러로 거래된 적이 있다고 하는 차량. 현재는 전세계에 단 여섯 대, 이 중 리무진 버전은 해당 차량 한 대만 존재하며, 8기통 12.7L 엔진에 300마력이다. 무려 6.4m에 달하는 압도적인 전장을 자랑한다. 자세한 내용은 [[부가티 타입 41 루아얄|해당 문서]]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motosportstravel.com/95customs_Bugatti-e1424230574467.jpg|width=100%]]}}}|| || {{{#000 [[부가티 타입 57#s-3.2.4|{{{#000,#fff '''1938 부가티 타입 57s(+c) 애틀랜틱 No.57591'''}}}]]}}}[* 경매 포함 가장 비싼 차량들 중 한 대 이며, 한화로 무려 약 '''515억'''이다. 에토레 부가티의 장남 [[장 부가티]](1909~1939)가 디자인했다. [[부가티 타입 57#s-3.2|부가티 타입 57s/sc 애틀랜틱]]의 파생 중 하나이고, 단 4대만 제작되었다. [[부가티 타입 57#s-3.2.2|그 중 한 대]]는 [[장 부가티]] 개인이 소유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실종되어 현재는 3대만 남아있다.] || [[에토레 부가티]]가 1909년 부가티를 설립한 이후 세계 최고급 자동차들을 생산하던 회사가 되었다. 모든 차량은 [[수제|손으로 제작]]되었으며, 엔진을 제작할때 별도의 밀봉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각 부품이 완벽히 들어맞을 때까지 일일이 손으로 깎아 모양을 내는 등, 애초에 대량 생산은 기대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러나 그만큼 차량 하나하나에 엄청난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는 의미이므로, 특유의 뛰어난 마감과 내구성, 그리고 심미성[* [[에토레 부가티]] 본인이 예술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디자인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럭셔리카 회사 중 하나였다. 특히 차의 마감 품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남들이 차축에 [[스프링]]을 나사로 박아 대충 고정시킬 때 부가티는 차축에 스프링이 꼭 맞을 만한 크기의 홈을 파 끼워넣었고, 엔진 룸을 열면 엔진 룸 내부와 엔진 블록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으며,[* 영어로는 engine turn이라 부르는, 작은 부채꼴 무늬를 특수 기계로 반복해서 새겨 넣어 전체적으로 비늘을 두른 듯한 모습을 갖게 하는 기법이다. 베이론의 계기판을 알루미늄 재질로 고르면 같은 무늬가 계기판에 새겨져 나온다.] 그 엔진은 다른 차들처럼 무슨 패킹 같은 걸 하지 않고도 오로지 부품 간 단차만으로 기름 한방울 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작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럭셔리카만 만들던 회사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럭셔리카 사업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레이싱 모델이나 [[스포츠카]] 제작에서도 이름이 높았고 [[모터 스포츠]]에도 많이 참가했으며 [[타입 35]] 단일 모델로만 '''7년동안 2,000번 이상 우승'''하는 등 뛰어난 실적을 거뒀고, 지금의 폭스바겐 산하 부가티가 그러하듯 세계 최고속의 자동차를 만드는데도 힘을 썼다. 이 중 1939년 [[르망 24시]]에 출전해 우승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드라이버 이름이 피에르 '''[[부가티 베이론 16.4|베이롱]]'''(Pierre Veyron)이었다. 당시 부가티의 위치는 현재 시각으로 보자면, '''[[페라리]]의 경주 성능에 [[람보르기니]]의 디자인, 그리고 [[코닉세그]]의 속도에 [[롤스로이스]]의 품격까지 더한것과 같았다.''' 부가티는 그 엄청난 품질과 성능, 그리고 명성에 걸맞게 가격도 대단히 비쌌으며[* 당시 가격이 롤스로이스의 유사한 모델의 두 배 이상 되었다.], 전세계의 [[왕족]]과 부유층이 주요 타겟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대를 잘못 골랐던 탓에 하필이면 [[제1차 세계 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과 시대가 겹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당시는 각국에서 [[군주제]]가 폐지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판매량은 바닥을 쳤다.[* 약 40대 가까이 되는 차 중에 3대밖에 못 판 시기도 있었다(...)] 에토레 부가티의 장남이자 차기 사장감이었던 [[장 부가티]]가 [[1939년]]에 자동차 시험 주행 도중 사고로 사망하고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공장]]이 파괴되면서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에토레 부가티가 1947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리더를 잃은 회사는 [[1952년]] 파리 모터쇼에 T57, 타입 101과 함께 마지막으로 모습을 비치고는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 후 [[크라이슬러]]의 수석디자이너였던 [[버질 엑스너]](Virgil Exner)와 장의 동생 롤랑 부가티(Roland Bugatti)를 포함한 몇 명이 회사를 다시 살려보고자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 [[1963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여담으로 부가티는 당시 세계 최고성능의 자동차로 이름이 높았던 덕에 엔진만 만들어 타사에 납품하기도 했으며 이 중에는 [[열차]]와[* 처음부터 열차 엔진으로 개발하지는 않았고, 위의 타입 41 루아얄 모델이 거의 팔리지 않아 미리 만들어두었던 루아얄 엔진이 악성재고로 남았기 때문에 이를 재활용했다.] [[비행기]] 전용 엔진까지 있었다.[* 성공까진 못했다.] 이후 이 엔진 제작 분야는 [[스페인]]의 [[이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에 매각되어 근근히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이스파노-수이자는 [[1968년]] 프랑스의 비행기 제조사인 [[스네크마]]에 인수되었다. 부가티는 현재 스네크마와 같은 사프란(SAFRAN) 그룹 소속이자 비행기 [[랜딩 기어]]를 만드는 회사인 Messier-Bugatti-Dowty라는 회사로 남아있다. 부가티의 원래 공장부지도 현재 이 회사 소유이다. 다만 에토레 부가티의 생가와 그의 개인 실내 과수원[* 에토레 부가티는 [[오렌지]]를 특히 좋아했는데, 사시사철 싱싱한 오렌지를 먹기 위해 직접 실내 과수원을 지어 오렌지 나무를 심어 가꿨다.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등은 현재 [[폭스바겐 그룹]]이 소유하고 있으며, 부가티 쇼룸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명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쇼룸'''이라고도 불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