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르주아 (문단 편집) == 용어의 역사와 발달 과정 == 11세기 중세 성기를 맞이한 유럽에서는 도시가 발전하면서 성벽을 두르고 주교나 세속귀족 등 영주에 대항하고자 군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재판할 자치권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도시 및 성민의 성립에 관해서는 [[자유도시]], [[코뮌]], [[도시]], [[농노제]] 문서를 참고할 것.]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도시민들은 영주의 간섭을 차단하고자, 군주는 밖으로는 교황을, 안으로는 지역교회(주교)와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서로 결탁하기 시작하였는데, 군주로부터 [[삼부회]] 등 의회에 참여할 권한을 얻거나 관료로 발탁되거나 자치권을 보장받는 등의 특권을 얻는 대신, 세금을 군주에게 직접 납부하고 군주의 전시 소집 명령에 따라 참전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러한 도시민, 즉 부르주아들의 자치 전통은 법률적 근거로 보호됨으로써 단순히 군주를 위한 부품 중 하나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도시는 늘어났고, [[계몽주의]] 등 정치사상의 발전에 따라 서구 각국에서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네덜란드]], [[스위스]] 등은 아예 도시들이 자체적으로 동맹을 결성해서 독립적인 국가로 성립했으며, 멀게는 [[미국 독립 전쟁]]도 도시민들의 자치 전통과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영향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일어난 곳에서는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계급제도가 타파되고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어 [[민주주의]]의 기초가 완성됐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대거 쓸려나간 것은 프랑스 만의 이야기이다. 독일, 영국 등 다른 국가는 상대적으로 귀족이 적어도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었다.[*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많은 귀족 가문들이 멸문을 당했다.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나름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이기 위해 최전선에 하급 장교로 많이 지원, 참전해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장교라니 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1차 대전기 하급 장교들의 전사율은 사병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았다. 선두에 서서 진격을 독려하며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까지는 그나마 생존 확률이 꽤 있었으나, 기관총과 주퇴 복좌식 야포가 주력이 된 [[끔살|1차 대전시기에는]]....] [[봉건제]]이되 일찍이 중앙화한 국가체제를 구축해나가던 영국에서는 귀족 및 젠트리 계층이나 요먼 및 성민 등 평민 계층이나 동일하게 [[보통법|국왕재판소]]나 의회 등 군주권 하에서 딱히 마찰없이 공존하였다. 오히려 귀족 및 젠트리나 그 외 자본가 집단은 정치적으로 야합하거나 서로 통혼하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도 귀족의 출신에 따라서는 원래 부르주아였다가 고등재판관 등 관직에 진출하거나 영지를 사들이면서 신분상향한 경우도 많았고, 혁명 동안 줄을 잘 선 귀족들은 목숨 보전 정도가 아니라 [[부르봉 왕정복고|왕정이 복고하자 왕위를 먹는데 성공하는 등]] 생각하는 것만큼 귀족들이 다 쓸려나간 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바꾼 것은 귀족을 (특히 법적으로) 실권도 특권도 없는 단순 명예직위로 바꿔버린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프랑스 혁명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전형(model)이 다른 국가에도 전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프랑스의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상공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기는 했다. 하여간 [[프랑스 혁명]]기만해도 정작 부르주아는 그냥 일반 자유민, 시민이었다. 특히 파리 시민을 등에 업고 왕 모가지를 뎅겅 자른 이들이 프랑스 혁명 정부의 정치인들이었기에, [[자코뱅|온 시민에게 평등하게 새 나라의 권리를 나눠야한다는 정파]]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칠 것으로 보였던 정치혼란이 끝이 보이지 않자, 혁명에 피로를 느낀 프랑스 국민들 스스로가 독재정 및 군주정을 지지하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한 [[나폴레옹]]이 급기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거나 왕정이 복고되었는데, 그런데도 혁명 이후 프랑스 귀족 계급은 절반 이상이 혁명 이전에는 평민이었던 신흥 귀족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기존 대토지 귀족들과 달리 상업자본가들이었고, 일종의 벼락 출세꾼이다보니 기존 귀족의 [[아비투스|관습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려고 했다. 오직 혈통빨과 대대로 물려받은 땅으로만 귀족 이름을 달고 있던 사람들이, 능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로 왕창 물갈이 되고, 심지어 당시 일어나던 산업 혁명의 힘까지 입어 이 시기 프랑스 귀족 문화는 이전보다도 더 화려하게 발전했다. 이 무렵에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 고딕 리바이벌 양식, 네오 비잔틴 양식 등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보다도 한층 더 발달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축 양식이 대유행을 탔다. > 부르주아지는 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시대의 굴레를 무자비하게 뜯어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벌거벗은 이기심과 감정 없는 '현금 지불'이라는 관계만이 남게 됐다. >---- >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인 외경심, 기사도의 열정, 속물적인 감상주의까지도 몽당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얼음물 속에 처박아버렸다. >---- > [[공산당 선언]] 이전에는 단순히 시민 계급을 의미하던 '부르주아'라는 단어에 붙게 된 화려하고 귀족적인 심상(image)은 저 시기 프랑스의 벼락 출세 신흥 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양판소]]나 [[로판]]에 나오는, 전형적인 귀족에 대한 이미지 상도 딱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을 아예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이다. [[맑시즘]]에서 맑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를 유산 계급인 부르주아와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로 나눠지는 계급사회로 규정한 이래로, '부르주아'라는 단어는 곧 [[높으신 분들]]을 뜻하게 되어버렸다. 역사학, 특히 중~근세를 다루는 부분에서 부르주아라는 말은 맑시즘 및 현대적 용법의 부르주아와는 다른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