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마민주항쟁 (문단 편집) === 계엄군의 진압 ===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711100500005_1.jpg|width=100%]]|| || 부산 시내에 주둔 중인 [[M47 패튼]]과 [[KM900]] ||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한민국 해병대|제1해병사단]][* 당시엔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병부대들은 모두 해군 제2참모처(처장은 보병[[중장]]) 예하에 있었다.]의 제7[[연대(군대)|연대]][* [[연대장]] [[보병]] [[대령]] [[박구일]]]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이 중 부산에 있던 계엄사령관과 3공수 특전여단장,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은 소요사태에 대한 빠르고 강경한 진압을 계획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0942587|#]]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해당 증언을 자세히 보면 이 증언은 당시 실제로 출동한 해병대 제 7연대가 아닌 제 2연대의 해병대원일 뿐만 아니라 증언 자체도 전해 들은 내용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내수공업자 김○○(당시 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금은방 직원 전○○(당시 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 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당시 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망자는 없다.] 사망자까지 나왔다.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그는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던 차에 보름이 지난 11월 초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0595|#]] 반면, 해병대 내에서는 [[박구일]] [[연대장]] 지휘하에 투입된 해병대 제7연대의 주민친화적 행적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6857/1|실제로 신동아에서는 해병대의 신사적 계엄임무 수행에 대해 당시 투입된 해병들과 시민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