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여 (문단 편집) == 정치 ==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였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군주'''왕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의 '''가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등의 '''제가'''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다만 하호와 별개로 노비층도 있고, '하호'라는 계층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부여 하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했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부여는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립정부|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이었다.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했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져 왕을 처형하는 일은 없어졌으나, 다른 주변국가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어디까지나 '''[[백제|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했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부여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여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