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미관계 (문단 편집) === 정부수립 이전 ===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이 분단되면서 38선 이북은 소련의 지휘 하에 놓였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일명 조공분국, 현재 [[조선로동당]]의 전신]은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성장하였다.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연히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시종일관 미국에게 적대적이었을 것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조공분국의 초기 대미관은 우려와 낙관 사이에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가 조공 제4차 평남지구 확대위원회의 결정서.[* "미영제국주의"의 재침략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기존 강령을 "미영 민주주의국가"를 "우리의 벗"으로 규정함과 더불어 그들과 친선을 도모하는 취지의 내용으로 수정하였다.] 물론 이는 북한 지도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소련의 압박에 의한 입장변경에 가깝다. 종전 직후 미소 양국은 반파시즘 전선을 함께하며 친선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미국과 날을 세워 대립하는 북한의 대미정책은 소련의 대미정책에 거스르는 대응이었다. 따라서 소련에서는 일부 인사를 북한으로 보내 미소간 친선정책을 강조하는 등 북한에게 대미 협력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두 번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수위도 덩달아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7년 말, 온건적인 대미비판은 북한의 문건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이러한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료가 바로 북조선로동당의 이론잡지 '근로자' 속 '석국(石局)'이라는 필명의 저자가 쓴 두 논문이다. 1947년 10월과 1948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논문을 기재하였는데, 첫 번째 논문에서는 미군정 비판에 대해 제한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두 번째 논문에서는 강경한 논조로 미국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거친 뒤 북한에서는 해방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47년 말에 형성된 미제국주의상은 이후 본격적으로 이론적 내용을 가미하며 단단해져갔는데, 논증 재료를 미군정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38선 이남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두 가지 재료로 미군정의 실책성 경제정책과 미국에서 유입된 개방적인 성문화이다. 미군정은 식량문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미곡수집령을 시행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곡물의 가격을 상승시켰고, 역으로 미국의 잉여곡물을 수입해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민사작전#s-4.1|해당 문서]] 참조.] 북한에서는 이를 의도적 계획에서 비롯된 행위로 인식하며, 남한경제를 미국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즉 남한을 식민지화하려는 미국의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개방적인 성문화 또한 "제국주의적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바라보았으며,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관성과도 맞부딪히며 부정적 대미관을 유포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610736|출처 논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