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미관계 (문단 편집) === [[김일성]] 정권 === [[파일:105085698-AP_110823029571.530x298.jpg]]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직위)|주석]]. 1948년 9월에 북한 정권이 수립됐지만 미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문에 북한엔 미국의 대사관이 없으며 미국에도 북한의 대사관이 없다. 다만 [[뉴욕]]에 주[[유엔|UN]] 북한 대사가 체류해서 북한의 대외창구 역할을 하기는 한다. 그래서 이 뉴욕에서의 미북 간 접촉 통로를 '뉴욕 채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은 [[스웨덴]] 영사가 북한 관련 업무를 맡는다. 스웨덴은 중립국이며 북한과 수교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6.25 전쟁에 개입하였다. 이후 전쟁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잠시 북한의 영토에 진입하지만 이내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나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지다 휴전된다. 그 후 냉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과 북한의 교류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으로 나타난다. 그 기간 중에 미군 탈영병 일부가 [[월북]]하기도 하였다. 찰스 젱킨스(Charles Robert Jenkins) 중사가 대표적. 또한 [[OH-58]]의 보비 홀 준위사건으로 미북간의 접점이 생기기도 했었다. 당시 보비홀 준위와 데이비드 하일먼이 몰던 헬기가 실수로 북 영공을 침범했다가 북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를 당했다. 이것으로 데이비드 하일 먼은 현장에서 추락사하고 보비 홀 준위 만이 살아남아 북에 피랍되어 2주동안 억류되어 있다 풀려났다.[* 이때 찍힌 보비홀 준위의 손을 든 사진과 영상이 반미교육 당시 미제의 말로라는 것으로 굴욕을 얻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중국은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진행하고 이듬해 [[닉슨-마오쩌둥 회담|상하이 코뮈니케]]를 선언하며 [[데탕트]]에 접어들게 된다. 북한은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정세라고 판단하여 미국에게 선제적으로 협상을 시도하였다. 이 때 중국을 통해 전달한 '8개 항목'에는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동북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미국 정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90년대 한국은 차례로 소련, 중국과 수교하면서 데탕트에 성공하면서 북한은 자신들의 정권 존립에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은 핵개발을 포함한 벼랑끝 전술을 시전하는 등 대결적 접근법을 선택하는데, 이로 인해 북미관계는 점점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된다. 영변 핵시설 폭격을 두고 전운이 감돌자 [[지미 카터]]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4년에 [[전 대통령]]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https://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kim/interviews/carter.html|#]]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3년 정도 전부터 김일성에게 러브콜을 받은 듯하다.] 카터는 [[김일성]]을 만났는데 국빈 취급 받았다. 다만 보름 후에 김일성이 죽는 바람에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해보려던 [[김영삼]] 입장에선 좀 벙찌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성과가 완전히 없던 것은 아니다. 물론 제네바 합의는 8년 만에 공식적으로 백지화되며 어디까지나 실패한 합의가 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으로는 당시 미국 의회에서 공화당의 격렬한 반대와 이에 따른 자금지원 불허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지적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