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일랜드 (문단 편집) == 역사 == 본래 북아일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소속 아일랜드, 그 중에서도 동북부 [[얼스터]] 지방의 일부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얼스터 지방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임과 동시에 켈트계 세력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 때문에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국왕을 겸하는) 잉글랜드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얼스터의 켈트계 가톨릭 영주들의 반란에 자주 시달렸다. 이에 질릴대로 질린 [[제임스 1세]]는 1606년부터 북아일랜드 지역에 '얼스터 식민(Plantation of Ulster)' 정책으로 반란을 일으킨 켈트계 영주들의 영지를 몰수해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에게 불하하며 그들을 얼스터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제임스 1세 이후로도 개신교도 영국인들을 이주시키며 적극적으로 얼스터 지방의 영국화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은 아일랜드 독립 전에도 친영-개신교 성향이 짙은 지역으로 19세기 말 제안된 아일랜드 자치(Irish Home Rule)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지였으며, [[1918년]] 영국 총선에서 다른 아일랜드 의석을 독립주의자 [[신페인당]]이 휩쓰는 와중에도 친영파가 의석을 확보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끝내기 위해 [[1920년]]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남부 아일랜드의 분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북아일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은 북부의 확실한 다수파를 차지하기 위해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지방 9개 주 중에서 유난히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3개 주(도니골, 모나한, 캐번)을 '''의도적으로''' 분리시키고 6개 주만으로 영국에 귀속되는 북아일랜드를 만들었다.[* 만약에 얼스터의 나머지 3개 주가 북아일랜드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경우 개신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인구 비율은 가까스로 개신교 신자들이 우세하기는 하나 다수파로서의 의미와 다소 거리가 먼 1:1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3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주에서의 인구 비율은 약 3:2로 이 경우는 개신교 신자들이 다수파로서의 기득권을 차지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 [[1921년]] 5월 3일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분리된 북아일랜드가 정식으로 성립하였고 '''2021년으로 북아일랜드 성립 100주년을 맞았다.''' 북아일랜드 분리 이후 연합주의자들이 대부분의 의석을 독점하였으나, [[1968년]] 이후 [[북아일랜드 분쟁]]으로 영국의 화약고가 된다. [[1998년]]에 [[벨파스트 협정|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체결되면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정세가 안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