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제 (문단 편집) === 북제 멸망의 원인 === 보통 잘 알려진 일화로, '강을 끼고 대치하던 북제와 북주 사이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도강을 막기 위해 국력이 약한 북주가 [[얼음]]을 깼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얼음을 깨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 원래부터 황하 동쪽 하동 분지가 북주 땅이었다. 원래는 하동이 동위 쪽이었는데 여기를 따인 시점부터 동위, 북제의 방어선의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한다. 즉, 해당 일화에 나온 양측의 황하 경계 인근 북주도 아니라 서위 시절에 [[우문태]]가 점령한 땅이었던 것. 당장 북주의 명장 [[위효관]]이 지키던 옥벽성부터가 하동 땅이고 포판은 사원 전투 이후에 점령했다. 때문에 서위-북제의 경우엔 근본적으로 지형상으로 방위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제의 공식적인 수도는 업이지만 군사력의 집결지이자 북제 황제들이 실질적으로 기거했던 곳은 [[타이위안|태원]](진양)이다. [[동위]]와 [[서위]]가 갈라진 534년 고환 시절부터 북제 황제들의 활동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태원과 업도 사이를 왕래하였다. 534년부터 북제가 멸망하는 577년의 43년 사이에 북제황제들은 양측 지역을 37회 왕래하였는데 진양에 머무른 기간이 약 29년, 업도에 머물렀던 시간이 14년으로 진양에 있던 기간이 업도에 있던 기간의 배이다. [[문선제]]를 제외한 [[폐제(북제)|폐제]]와 [[효소제]], [[무성제]], 고위는 모두 진양에서 즉위하였고, 만약 계승자가 태원에 없을 때는 진양으로 달려가 즉위하였다. 따라서 진양은 실질적인 수도였고 정치 중심의 소재지였다. 이러한 취약성이 있었지만, 원래 북위 군사력을 장악한 [[이주영(북위)|이주영]]의 본거지가 진양이기도 했고 북제 군사력의 근간인 육주선비(六州鮮卑)가 진양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북제 황제들은 진양을 버리고 업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제에게 있어서 진양은 말할 것도 없이 사새지지라 불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하북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양은 원래 이주 씨의 근거지였는데 육진의 난을 계기로 남하한 북진민들이 이주씨의 통제 아래 진양에 거주했다. 그 뒤 고환은 진양을 근본으로 삼아 황제를 통제했고 고징이 암살 당하자 고양이 진양에 갔다. 이후 북제가 건국되고 업도가 수도가 되었지만 진양의 군사적 중요성은 오히려 강화되었는데 때문에 북제 황제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진양에 머물렀는지 알 수 있다.[* 길게 말할거 없이 진양은 [[조간자]]가 세운 도시이자 조씨의 근거지였다. 그 다음대인 조양자 시기에 조씨와 지씨의 대결이 있었는데 이 때 조양자는 이 진양에서 3년이나 농성전을 벌였고 결국 지씨와 조씨 모두 피해를 입은 사이 조양자가 이전부터 지씨에 불만이 많던 한씨와 위씨를 끌어들여 지씨를 멸했다. 그만큼 진양이 튼튼하다는 얘기.] 진양이 군사적 중요성이 커진다쳐도 군사 중심지와 수도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선제가 업에서 즉위한건 진양의 훈귀들이 그의 즉위를 반대해서 그렇고 문선제도 즉위 후 원훈들의 묘에 즉위 사실을 보고해야 했다. 제나라 황제의 즉위는 강력한 군사집단인 진양의 훈귀 집단의 승인이 있어야했으므로 북제 황제들은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다. 또 고위는 진양이 함락되면 업이 아닌 북삭주로 가려고 했다한다. 그 이유는 북삭주는 같은 종족인 선비 강병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업은 한인의 근거지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제는 항상 한인과 선비족들의 알력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북제 말기 선비족을 우대하는 방침도 사실은 이들의 군사력이 북제를 유지하는 힘이었기에 버릴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북제 황제들은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써의 모습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고 무리하게 숙청을 하거나 후대에 폭군으로 보이는 짓들을 한 것도 이것에 영향이 없다고 볼 순 없다. 결국 이런 이유로 북제는 업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그 군사상 중심은 진양에 두고 황제들이 항상 업과 진양을 오갔으며 북위가 말기에 [[낙양]]에 천도한 후 원래 근거지로부터 고립되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하였다. 이곳이 공격에 취약한 곳이 되었던 이유는 북주의 수도 장안과의 사이가 거대한 평지로 연결되어 진격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즉 북제 입장에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다. [[고환(남북조시대)|고환]]으로부터 [[우문태]]가 독립한 이후 장안과 진양 사이의 지역은 한번 승세를 타면 [[파죽지세]]로 상대국의 수도까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즉, 양측이 이 지역에서 붙은 거대한 [[회전]]에서 한번 이기면 그걸로 승패가 결정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양과 장안 사이의 지역은 서로의 급소를 겨냥할 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였다. 그런데 만약에 북제가 황하 인근의 하동이라도 보전하고 있었다면 북제가 황하를 경계로 국정을 안정화 할 수 있었겠지만 거길 빼앗겼기에 북제 입장에선 진양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에 압력이 가중되었다. 물론 북제의 주력이 진양에 집중된 만큼 진주의 방어가 튼튼하기 때문에, 북주는 처음에는 낙양→업으로 공격하는 루트를 선택하지만,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나중에서야 북주는 북주 무제 [[우문옹]]이 루트를 바꾸어 진양을 직접 공격하면서 타격을 주려고 했고 이게 먹히면서 북제는 멸망한다. 요약하자면 북제의 주력이 진양에 집중했던 것은 북주의 공격에 유리했지만 반면에 북주의 공격을 받아 한 번에 붕괴될 경우 대치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군사적으로 취약하였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동위-북제는 원래부터 서위-북주가 군사력이 강했고 실질적인 지형상의 우세도 북주가 가지고 있었지만 북제가 군주와 장수들의 역량으로 이를 잘 막아내는 처지였다. [[육진의 난]] 이후 육진이 분해되어 버리면서 실질적으로 북위의 중심지였던 북제 지역의 군사력이 위태로워 진 것도 북제 열세의 이유였다. 즉 북제 입장에서는 지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책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 그냥 군주와 장군의 군사적 역량으로 정면 돌파해서 무조건 북주를 싸워서 이기는거 말고는 답이 없었다. 육진이 망하고 난 뒤엔 하북 어디나 돌궐과 북주의 사정권이니 내몽골 회복이나 남벌 성공 후 천도 외에는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위, 서위가 북제와 북제로 막 교체된 무렵에 북방에서도 유연이 망하고 돌궐이 흥기하는 이변이 터졌다. 유연은 그래도 북방민족 중에서 꽤 만만한 수준이었으나 돌궐은 전성기이던 4대 카간 타발카간 시기에는 북주와 북제의 황제들을 '남쪽의 아이들' 이라고 칭할 정도로 잘 나갔다. 물론 이는 북위가 둘로 쪼개져서 북방민족을 견제할 힘도 약해진 것이긴 하나 그게 아니더라도 돌궐은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보할 정도로 강했다. 북주도 버거운데 위에는 돌궐이라는 신흥강자까지 나왔으니 북제 입장에서는 전선 두개가 위험한 셈이다. 게다가 북제 초반기에 남조에서도 양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들어서는데 진나라는 남조 국가들 중에서 그래도 진패선-진천-진욱이라는 정상적인 황제라인이 이어졌고 덕분에 북제가 망해갈 무렵엔 망해가는 북제를 쳐 일시적으로 회하 일대를 영토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나마 가장 만만할 전선이 남조쪽인데 남조쪽도 이지경이었다. 북주도 삼면전선이다만 그래도 말했듯 북제를 상대론 우위, 남조를 상대로도 촉 지역까지 먹어 우위가 되었고 또 이 시대에만 해도 장강 남쪽은 장강 북쪽보다 인구가 한참 적었다. 남조 입장에서도 수도권에 국경이 있는 북제가 그나마 멀리 떨어진 북주보다 더 버거웠을 것이고... 이정도면 돌궐만 신경쓰면 되는 수준.] 이런 상황에서 바로 위에서 보듯이 후주 고위가 당대의 명장들을 자기 손으로 숙청해버리는 등의 실책으로 나라를 신나게 말아먹었으니 형세 역전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북제가 망할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위는 우문옹이 공격해왔을때 기연지(祁連池)에서 황후 풍씨(풍소련(馮小憐), 고위가 아끼던 애첩), 고아나굉 등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구원병도 보내주지 않았다. 평양이 함락당하자, 고아나굉이 고위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고위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우문옹은 고위의 군대는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하고 후퇴하고 평양에는 양사언(梁士彥)을 남겨 지키게 했다. 우문옹은 얼마 후에야 다시 북벌했는데 이는 개전 초기에 북제가 우세했음을 시사한다. 북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평양을 공격했고 얼마 후 성벽에 구멍을 냈다. 다시 북제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때 갑자기 고위는 공격을 멈췄다. 왜냐하면은 풍씨를 불러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막장 플레이에 평양은 북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고위는 풍소련과 간신 목제파가 패닉 상태가 되어 도망가자고 하자 고위는 진양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진양으로 돌아온 고위는 사촌인 고연종(高延宗)과 고효형(高孝珩)에게 진양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삭주(朔州)로 도망가려 했지만 고연종은 이를 말렸다. 그러자 그는 먼저 태황태후 호씨와 아들 고항(高恆)을 먼저 삭주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북주군이 진양에 다다르자 그는 진양을 고연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삭주나 돌궐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매승랑(梅勝郎)의 제안으로 업성으로 도망 갔는데 고아나굉도 함께 갔다. 이 상황에 이르자 당옹(唐邕)을 비롯한 북제의 신하들은 도망가기 바쁜 고위보다 고연종이 황제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고연종은 사양하다가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비정통 황제로 남아 있다. 다음 날 북주군의 진양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고연종의 군대는 북주군을 막아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고연종의 부대는 이 승리에 도취해 부대를 재편성하지 못했고 다음 날 북주의 공격으로 진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북제 제2의 수도 진양의 함락은 북제의 정예 군사력이 모조리 소멸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북제 멸망이 기정사실화 됐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진양 함락 이후 북제가 저항하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진양과 그 주변에 북제의 정예부대가 포진하였고, 이들이 패하자 다른 지역의 군대를 차출하여 대항하기 어려웠던 것이 북제가 진정으로 패망한 원인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eijin&no=47289|이상의 내용은 '중국 북조 지방통치 연구(최진열)'와 '중국 중세 호한체제의 정치적 전개(박한제)'의 요약본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