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문화 (문단 편집) == 특징 == 여타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문화예술도 개인의 창작 자유보다는 국가와 당의 주도에 훨씬 큰 비중이 쏠리는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흐름을 띄고 있다. 그나마 현대예술에 대한 사조를 어느 정도는 용인해 줬던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여전히 빗장을 꽉 걸어잠그고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예술가들이나 연예인들의 형편과 대우가 좋지 않아, 사회주의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이 사회적으로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건 [[존 하지]] 미군청장의 삽질 때문이었다.] 인재풀 자체는 북한이 더 풍부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문화통제를 단행하면서 자기한테 거슬리는 문화계 인사들을 차례차례 수용소나 지방으로 내쫓기게 만들었다. [[최승희]], [[강홍식]], [[임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대표작가였고, 해방정국 때 월북한 뒤 한국전쟁 내내 [[조선인민군]]에 종군했지만, 임화 자체가 워낙 다다이즘부터 맑시즘까지 다양한 영향을 받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문화 통제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로, 박헌영-리승엽 간첩사건에 휘말려 사형당한다.]가 대표적인 예이고, [[백석(시인)|백석]]처럼 험한꼴은 안 당했지만 문단에 복귀못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여생을 보내는 신세가 된 예도 있었다. 게다가 1950년 후반경 [[김일성]]이 북한의 학교를 시찰하던 도중, '''교실에 소련 음악가, 문학가의 초상화나 작품은 많은데 우리 민족 예술가나 작품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문화부분에서의 [[주체]]를 강화하자는 운동과 더불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문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운동의 여파는 [[도서정리사업]]의 전조가 된다.] 사실 전통적인 소재의 작품을 장려하는것이야 남한에서도 하던 일이니 이상할것은 없는데 김일성은 여기서 내용전개까지 간섭했다는것이 문제점이다. 결국 북한에서 좋은소리 듣는 예술작품은 모두 '''북한식으로 토착화 된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예술'''만을 뜻하게 된다. 흔히 1960년대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살았다고 하지만, '''대중문화를 누릴 자유나 창작의 자유까지 앞서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동시기 남한도 문화 탄압을 했다지만, 북한 수준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볼 수 있는데[* [[블랙리스트|'XX를 하지 말라!']] 와 [[화이트리스트|'XX만 하라!']]의 차이는 엄청나다.], 북한이 남한보다 문화적 역량이 꽤나 떨어졌다는 그 증거 중 하나가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문화예술가들이 몸보신과 출세에 급급하며 창의적인 작품보다는 그 나물에 그밥인 식상한 작품을 내놓는 경우가 많아 김정일도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남한에서 감독을 순수 수급(?)해온것이다. 그나마 '전통적인' 흐름에 몸을 맡긴 예술인들도 격변하는 내부 정세 속에서 자리를 잘못 잡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안 좋게 찍혀서 탄광이나 수용소, [[집단농장]]으로 보내진 경우도 꽤 된다. 특히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김정일이 문화예술 부문에서 직접 지도자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개인에 의한 창작활동 보다는 여러 창작가들이 집단으로 모여 창작하는 소위 '집체 창작'이 일반화 되었다. 다만 김정일은 평소에 외국영화를 즐겨보고 영화에 있어서 전문가인지라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심지어 자기를 왜곡하면서 비하하는 드라마인 [[지금 평양에선]]을 가끔씩 시청하며 연기력을 비평하기도 했다.] 김일성보다는 [[꼰대]] 기질이 덜했던지라 1980년대 쯤에는 이런 집체 창작 열기가 잠시 수그러들고, 시집이나 소설, 음악작품, 미술작품 등에 창작가 개인의 이름을 붙여 내는 경우가 다시 많아졌고, 로맨스 영화와 특촬물도 제작되어 인기를 끄는 등 영화의 소재도 다양화되었지마 [[냉전]]이 끝나며 북한이 고립되었고,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난도 겹치며 이러한 기조는 사그라들었고 다시 '우리 식대로 살자'는 식의 내용의 문학작품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시 조금씩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의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지만, 날로 악화되는 경제 사정과 주변국들의 이런저런 정치/경제 제재로 인해 앞으로 북한 문화예술계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이전에도 자본주의를 경계하자는 주장은 남북관계가 좋을 때도 있었으나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로 직접적으로 '비사회주의'에 대한 언급이 느는 등 문화 검열이 다시 심해지고 있고, 이제는 체제 위협이라고 여기는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 제정 같은 아주 과격한 행태를 김정은이 보이고는 하였다. [[김일성]]의 문화 검열보다 더 심한 면이 있다. 한국에서 북한 문화매체를 포함한 관련 자료들은 정부 내규인 '특수자료취급지침(구 불온간행물취급지침)'에 따라 지정된 취급기관에서 [[http://oak.go.kr/central/journallist/journaldetail.do?article_seq=10194|관리되고 있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7.7 선언'에 따라 '북한 및 공산권 자료개방' 방침을 발표하면서 제한적으로나마 점차 개방되기 시작했고, 1990년 통일원이 서울 광화문우체국에 북한자료센터[* 2009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전.]를 개관한 후 북한의 교육자료, 영화자료 등을 합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