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산성 (문단 편집) == 내부시설 ==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에는 초루가 설치되었고,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과 수문이 설치되었다. 성곽에는 성문 이외에 시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 등 3장대[* 동장대만 복원 됐고 나머지는 그냥 푯말만 꼿혀 있다.]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 1915년 대홍수로 박살났다. 당시 성공회에 임차해주었는데 내전 하나 남기고 다 떠내려가서 관리인까지 사망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터는 발굴 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출입이 금지되었다.]을 건립하였다. 또한 주둔부대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인 유영지 3개소,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 3개소, 성곽 관리와 방어를 분담한 [[승병]]들이 주둔할 승영사찰 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유사시 도성민들이 전부 들어가 항전할 때 필요식량을 대략 계산한 결과, 무려 '''곡식 10만 석'''[*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지 계산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곡식 한 석을 180.39 리터 용량이라 함은 에도시대 일본 기준이고,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이 기준을 받아들였다. 조선에서는 기준용량을 소곡(小斛)과 대곡(大斛)으로 나누었다. 세종대왕 때 교정된 영조척(營造尺)이 30.8cm라는 설에 따라 환산할 경우, 소곡이 약 85.9리터, 대곡이 114.53리터 정도다. 이에 따르면 소곡으로 10만석은 859만리터, 대곡으로는 114만 5300리터가 된다. 또한 벼 180리터를 도정하면 쌀 144kg이라는 기준에 따라 계산해보면 소곡 10만석은 6872톤, 대곡 10만석은 9122.4톤이 된다. 결국 대략 7-8천톤 정도가 된다.]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에 그 많은 곡식을 산성 내에 쌓기는 힘들다고 산 아래에 창고를 지금의 [[평창동]]에다 '''평창'''이란 이름으로 만들고 5만석을 여기에 비치하게 된다. [* 게다가 평창동에는 이미 [[선혜청]] 평창이 있었다. 즉 큰 창고만 두개가 생긴 것, 한강과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창고가 두개나 들어선 이유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 사이에 있어 유사시 방어가 용이하고 창의문으로 미곡 출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강에선 홍제천을 따라 들어오기 편하고 도성 혼잡을 피할 수 있기도 하다.]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는데, 고축(高築)· 반축(半築)·반반축(半半築)으로 축성하였으며,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고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여장을 쌓을 시점에 이르러 [[겨울]]이 다가와 여장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다. 여장을 깬돌로 쌓으면서 진흙으로 그 빈틈을 속채움하고 바깥에는 석회를 발랐다. 문제는 이러면 겨울이 지나면 수축과 팽창 덕분에 무너진다는 것...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러 원 모습이 남아있는 건 없으며, 정조 때도 순조 때도 걸핏하면 관리소홀이다, 수리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와 결국 순조 때 행궁을 포함해서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문제가 있는데 서울시 복원구간은 [[서울 한양도성]] 여장을 베껴 만들어 성내에서 성 바깥이 안보이는 등, 원형과 여장기능을 상실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현황파악도 매우 어려운데 지형이 다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부 성벽 잔존구간은 접근조차 힘든 절벽 위에 있으며 분명 뒤편으로 나 있었을 순찰로가 침식되어 사라지고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잔존구간 위로 지나가게 되어 훼손이 더 심해지고 있으며 비봉능선에서 북한산으로 이르는 문수봉 구간은 심지어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고의로 파괴되어 있다. 또한 성벽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할 성랑지는 등산객들 휴식 및 식사장소로 걸핏하면 이용되어 초석 위치가 바뀌고 지표에 남은 와전류가 훼손되는 현실이다. 성곽시설 중 암문 중에 시체를 내보내기 위한 시구문이 있는 점, 성문 여장이 평여장[* 돌을 여러개 쓰지 않고 한개로 다듬어서 만듦]인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동 시기 산성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축성 이후 조선시대에는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이 점은 [[수원화성]]과 동일하다.], [[임금]] 행차가 몇 번 있었으나 행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때에 [[6.25 전쟁]]과 [[김신조 사건]]으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정문은 대성문이었으나 지형상 문제로 [[숙종(조선)|숙종]]은 대서문으로 행차했으며 [[영조]]는 대성문으로 '''내시 등에 업혀서'''[* 물론 어가를 타고 오다가 올라올 수 없는 구간부터 업혀서 올라왔다. 이러나 저러나 내시들이 무관만큼 튼튼한 것을 보여준 셈이다.] 들어왔다. 거기에 영조는 나갈 때 당시 소남문이었던 대남문으로 나가버렸다.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으로 둘 순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 대남문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미 반파되어 있던 북문 누각부재를 옮겨서 만들자는 의논이 실록에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