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이탈주민 (문단 편집) == 역사 ==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역사는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의 범주에 해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6.25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38선을 지금의 북-중 국경을 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넘어서 대한민국으로 향한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탈북민들이 북한 [[함흥시|함흥]] 이북의 [[함경도]][* 이북5도위원회 기준. 쉽게 말하자면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량강도]]와 [[자강도]]가 없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정구역을 말한다.] 출신이 많다면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들은 [[평양시|평양]], [[함흥시|함흥]] 이남 지역 출신들이 많다. 또한 과거 50년대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 같은 [[마오쩌둥]] 시기의 사건들로 인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도망치는 [[중국 조선족]] 청년들이 많았고,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중 국경지대의 조선족들이 생필품을 얻으러 북한에 넘어오던 시절이 있었지만,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개방의 효과가 84년경에는 북중국경에까지 미치면서 처지가 역전되었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의미로의 '탈북'이 시작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북한 경제가 붕괴된 때부터다. 1995~2000년까지는 [[중국공산당]]이 탈북자들을 사실상 묵인했었다. 그 때는 경제 개방한다고 큰 신경을 쓰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면서 중국 대륙에 살던 탈북자들이 북송을 피해 한국으로 매년 1000명 이상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한중관계]]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인권 문제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98년까지 남한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매년 많아야 수십 명 수준에 그쳤지만 1999년에 최초로 한 해 입국자 수가 100명을 돌파했고, 2002년에는 1,142명이 입국했다. 이후 2008, 2009년 입국자 수가 3,000명 수준까지 육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중국 공안]]의 단속 강화 등으로 2012, 2013년에는 1500명대에서 정체 상태에 있다. [[2016년 두만강 유역 대홍수]]로 [[두만강]] 가의 탈북 기도자의 은신처로 사용되던 마을이 감시가 가능하도록 위치가 옮겨졌으며, 2010년대 후반 들어 중국도 국경 전 지역에 거쳐서 자동화된 감시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북한도 이 수준은 못해도 감시 초소를 늘리고, 국경 경비를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시 강화로 그 수가 다소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2019년에도 1,000명 정도로 꾸준히 나왔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로는 남한으로 입국하는 탈북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탈북자 국내 입국 통계자료에서 2020년에는 229명, 2021년에는 63명으로 급속히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쪽에서 디지털 장비까지 동원해 북-중이나 동남아쪽 국경 감시를 강화하고 자국 내 이동에도 여러 제한을 두기 시작하는 등 탈북을 위해 필요한 국제 및 국내 이동이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의 유튜브에 따르면 한 달 동안 [[하나원]] 입소자가 3명 밖에 안될 정도라고 한다. 이 시기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기다리며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종식되면 탈북자 수는 어느 정도는 회복될지도 모르나, 김정은 정권이 2020년 이후 남한 문화를 탄압하며 탈북 차단에 혈안이 되어 단속으로 줄어들거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탈북하려는 수요가 동시에 있을 수 있어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이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