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 (문단 편집) === 공(空) ===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 원인과 결과.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인과에서 벗어나는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과 개념은 다른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에 의해서 의존적'이므로[* 상의상대],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 즉, "'''양극단은 공존한다'''"는 것이 '공(空)'이다. 여기서 '공'은 양극단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양극단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되, 양극단은 공존하므로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나누어서 봐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보자는 것)[* 여기서 '하나'로 보는 것을, 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범주로 볼 때에 두 개의 범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기준으로 볼 때에는 범주를 두 개로 나눈 그 하나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 이 기준을 없애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뜻에서의 '공'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개념은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하여 정리할 수 있으며, 이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된 언어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믿어왔지만,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공사상'에서 말하는 주요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 그럼 상대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사상과 상대주의는 다르며,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주의는 공사상의 일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까 어떤 것에도 특정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가 상대주의라고 본다면, 불교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모든 것에 각각의 특정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상대주의가 '색즉시공' 만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과 함께 '공즉시색'까지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보자'는 것은, 개념을 '구별'하는 '기준'을 없애서 이해보자는 것이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자'는 '하나가 되자'랑 다른 것이며, '하나가 되자'는 것은 또다른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공(空)은, '''모든 가치적 판단이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모든게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다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가치적 판단이나 개념이든 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말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봐야 된다는 것.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것은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Śūnyatā)'라고 하며 "부풀어 속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주스를 담을 수 있으며, 우유를 담을 수 있고,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비어 있다고 '이 그릇은 의미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것의 의미는 확정할 수 없어 비어 있다는 것까지가 공(空)이고, 그러한 빈 부분에 어떤 것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아닌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공과 유식을 다 말한 것이다.]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삶이 괴로울 때''' '혹시 내 생각이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하며 다른 생각을 살펴보는데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이 너무나 괴로울 때,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여러가지 대안들을 살펴보자는 취지이며, 따라서 '포기'나 '체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된다. '[[반야]]'도 '공(空)'과 비슷한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나누어 보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