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 (문단 편집) === 현실 ===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이 공(空)이고, 하나에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唯識)이다.[* 참고로 색즉시공은 공을 말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유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엽적이고 의미없는 것에 목숨 걸어가며 산다는 깨달음은 공(空)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는 깨달음은 유식(唯識)을 말하는 것이다. 공으로 집착을 버리고, 유식으로 희망을 찾는 것은 하나의 일관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원효]]는 공과 유식을 하나로 보아 일심(一心)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세상을 등져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면서까지 일반 백성들과 함께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얼마나 현실을 중요시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눌]]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수련을 합쳐서, 배워서 깨닫고 그것을 수련한다는 정혜쌍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수련한다는 뜻.]를 주장하였는데, 앞의 원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큰 통일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깨달음(이론)과 수행(참선)을 하나로 합치려는 정혜쌍수 역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중국의 [[교종]]과도 다르고 중국의 [[선불교]][* [[선불교]]의 [[화두]] 특성상, 하나의 틀에 넣어지지 않아서, 수백가지의 종파로 나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데, 때문에 [[도교]]와 합쳐져서 변질되어 버리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불교는 수백가지의 종파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이라 볼 수 있겠다.[* 당시 중국의 불교는 수십개의 다른 이론을 가지고, 서로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며 이론에 따라 여러 종파를 세웠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종파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교종이든 선종이든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불교로 가는 길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한국불교의 주류가 그렇다는 것)] ("중국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수많은 각론을 만들고, 한국은 중국의 각론을 받아들여서 종합하여 결론을 내며, 일본은 한국의 결론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나간다"고 이야기된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지눌의 영향 아래서 이렇게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었고, 현실을 극도로 중요시 하는 [[유교]]의 영향도 컸었기 때문에, '속세'마저도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하나로 보아, 현실의 삶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리하였다. 승려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나이고, 현실에서 벗어난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는 현실과 하나의 세상이다.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정작 지금 이 말 자체는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관념 」에서 다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되는데,[* 근본 불교가 비슷하긴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근본 불교는 언어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생각마저 벗어나라며, 언어자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금 관념에 대한 말은 관념을 벗어난 뒤에도 '관념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관념에 집착하게 되므로 현실로 돌아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언어를 버리느냐, 불교를 버리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버린 뒤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되는 이치인 것이다. [[성철(승려)|성철]]스님은 이를 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것은 공(空)이고,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의 입장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저 둘은 단지 탈속의 세상이고 거기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또다른 관념이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만 그 깨달음이 '끝'이 나므로,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기위해 살아야 한다(현실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는 의미에서, 옛 고승의 말을 빌려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강조한 것이다.[*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말했던 것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삶 자체가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는데, 수행해서 과거의 습관을 없앤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습관에게 굴복하면서도 다시 습관에 지지않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이, 삶인 것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집착인데,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수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괴로움이란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깨끗한 경지가 절에 들어갈 때만 생긴다면, 절에서 나오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괴로움 속에서도 그 괴로운 감정에 최대한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한 괴로운 감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