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 (문단 편집) == 주요 특징 ==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석가모니는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적으로 유일신교적 관념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유럽/아메리카/아랍인들이 처음에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해못할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숭배하는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전통적인 유럽/아메리카/아랍에서의 Religion의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뒤 자국에 불교를 설명하는 유럽/아메리카/아랍인들이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 하지만 '불교는 종교다'라는 말은 맞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기 위해 나왔고''' 의미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영어의 Religion과 한자어의 종교가 서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돈이다. '불교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불교 신자 앞에서 하면 불교 신자들은 기분 나빠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다[* 물론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같아서 좋다는 긍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엄연히 종교로서 불교를 따르는 신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폄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불교는 종교 아니니, 불경 읽으시면서 교회도/성당도/etc. 나와보세요'라는 식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다.] * 다만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반신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맞는다. >대승이 등장했을 무렵은 이미 붓다가 죽은 지 수 세기가 지난 뒤였고,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과장되고 윤색되었기에, 그는 반신적(半神的, semi-divine)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비로움은 마지막 열반에서의 그의 지위를 둘러싼 모호함에 의해 고조되었다. 상좌들은 비록 그가 이 세계를 넘어서 마지막 열반에 들었다고 가르쳤지만, 그를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대승을 따르는 이들은, 붓다처럼 자비로운 존재는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로부터 떼어놓지 않을 것이라고 논했다. 그들은 그런 존재가 ‘저편’ 어딘가에 여전히 있으면서, 지상에서 행했던 것처럼 온갖 존재들의 안녕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과 궤를 같이하여 그에게 존경과 숭배를 바치고 간구(懇求)하는 봉헌(奉獻)적 신앙도 생겨났다. >---- >-데미언 키온(Damien Keown)[*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 불교윤리학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 『불교』 참고로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현대화하여 읽는 독법이 서구에서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불교의 '인기 없는 요소'를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불교 현대화론(Buddhist modernism)’이라고 명명된 이런 불교 독해법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고, 현대 서구의 태도와 덜 조화되는 그 종교의 몇몇 특징들을 상쇄시킨다. 기적과 만뜨라, 주송, 부적의 효용성에 대한 믿음이 그런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신탁을 참고하고 있다. 신과 정령들이 거주하는 초세간적 영역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업의 힘에 대한 믿음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불교의 가르침들에서 핵심적인 또하나의 교리이다."{{{-2 (같은 책)}}}] * [[중도]]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힌두교]]의 일부 종파나 형제 뻘인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 일단 개조인 석가모니부터가 극단적인 단식과 걸행 등의 고행을 '''그만둔 다음''' 심신의 지나친 이완과 긴장 모두를 물리친 뒤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뤘다. 불교는 몸을 해치는 절식(絕食)이나 각종 무모한 고행을 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되며, 특히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하며,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기부|보시]]를 강조한다.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 사상|공(空)]]'으로 표현된다. * 항상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 [[대승 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방법의 수행을 권한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paramita'. 직역하자면, '저쪽 언덕(피안)에 도달한 상태'.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을 강물에다가 비유했는데, '감정'이라는 급류를 인간이 건널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강물에 빠져 평생을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고 보았다. 바라밀이란 이 '감정'이라는 강물을 안전하게 건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분하게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바라밀이란 해탈하는 방법이다. 6가지의 바라밀이 있는데, 이 6바라밀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있다. [* 여기서 방편, 원, 역, 지의 4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10바라밀]]도 있다.]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집중하는 것,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이다. *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통해 [[열반]](涅槃)’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오랜 역사 동안, 교의(敎義)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 '내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은, 부처님 유언에 '스스로에 의지하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삶의 주체인 나'와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버린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는 신뢰하되,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환상'(이 환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현재의 '나'를 믿기 때문에, 굳이 (변해버렸거나 변해버릴) 과거와 미래의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현실의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삶'에 집중한 불교의 개념은 실존주의 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실존주의와는 다른 미묘하고도 독특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실존은 고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인간 삶을 방해하는 권위에 대해 반항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제대로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아 긍정과 부정을 포함한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점, 그리고 '자아'마저도 또다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내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불교는 [[포스트모더니즘#철학|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이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현대철학자들도 많다. 삶을 방해하는 절대적 권위-'언어', '고정 관념'-에 대한 탈권위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승 불교 한정, 여타 종교에 비해 [[저승]]과 [[하늘]]이 다양하다. [[천국]]과 [[지옥]]만 언급하는 [[개신교]]나 거기에 더해 [[연옥]]의 개념이 있는 [[가톨릭]]과는 다르게 대승 불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및 그 외의 장소들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에는 천국과 지옥을 층별로 분류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지어진 예술적 창작물이다.]. 대승 불교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까지 수많은 하늘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옥은 불지옥 8종류와 얼음지옥 8종류에, 재판받는 길목마다 지옥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가장 지옥의 종류가 많은 종교이기도 하다. 또한 동물로 태어나는 환생을 지옥에 가긴 애매한 죄를 가진 영혼이 가는 형벌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축생계보다 죄가 무겁지만, 지옥을 갈 정도는 아닌 정도의 죄를 지은 영혼은, 불교 고유의 세계인 아귀도나 아수라 등을 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를 고민치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며 저승에 대해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살펴봐도 충분히 현실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고행을 포기한 후에 깨달음을 얻거나 타인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 해탈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석가모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B%AD%EC%82%AC%EB%AC%B4%EA%B8%B0|위키백과 14무기]] 참조. 여기서 '무기(無記)'란,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답도 찾을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형이상학을 위한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형이상학 질문은 오로지 '현실의 삶 - 그 괴로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원칙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