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정치·경제적 입장에서의 한국 불교의 역사 === 한국 불교는 '''현세구복적, 호국적'''인 특성을 띈다는 점이다. 당장 [[해인사]] [[팔만대장경]]만 봐도 [[고려]] [[무신정권]] 시절 [[몽골 제국|몽골]]의 침입을 막아내려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경전이다.[* 서양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전근대 [[유럽]]의 [[기독교]]를 믿는 국가들은 서로 자주 다투어도 같은 [[야훼|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호국적인 면보다는 신앙(나아가 그것의 질서, 이익) 그 자체를 수호하는 데 의의를 두는 경향이 짙다. 대신, 유럽의 이런 유일신 신앙은 각 도시, 나라의 [[수호성인]]의 존재로 호국적 성격이 나타난다. 같은 하느님을 믿지만 A 나라는 [[베드로]]를 주로 기리고, B 나라는 [[요한]]을 주로 기리는 식이다. 유발 하라리 같은 일부 학자들은 이런 유일신 기독교의 특징을 다신교적 요소로 보기도 한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종교나 학문으로서 [[한반도]]에 전래된 외에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는 입장에서 부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고대에 각 토속신앙으로 분열된 민심과 지배층을 한꺼번에 불교란 고등종교를 이용해 사상적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왕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개발해 '''왕이 곧 [[부처]]'''이라고 했고, 따라서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은 왕의 병사가 됐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사찰을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이렇게 승려가 지배층의 세력이 되면서 호국불교란 개념이 생겼는데, 이게 나중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는 개념이 된다. 그 이유는 따로 하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에서는 전국에 불교를 퍼트리는 것을 국가적 사업으로 삼았고 [[원효]], [[의상(신라)|의상]], [[원광]] 등 고승이 등장해 한국 불교 사상의 기틀을 잡았으며 현대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고찰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처음 건립되었다. 또한 [[황해도]]나 [[금강산]]과 같이 신라 중앙에서 거리가 매우 먼 지역까지도 서라벌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 그대로 보급되는 등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각자 태동했던 한국 불교가 비로소 통일성을 갖추고 보편화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집단에서 벗어나 지배계층으로 대두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고려시대까지의 불교계의 위상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는 얘기다. [[광종(고려)|광종]] 때 이미 승과제도를 도입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해 불교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나마 왕권보다 위에 두었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와 면역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받아 경제적인 성장의 발판도 마련했다. 사찰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술을 팔거나 고리대금업과 숙박업 등 상업활동에 관여하자 사찰의 세속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종파적 분열의 양상까지 보여 불교계 내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해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불교계의 경제적 폐단과 정치권에 대한 관여를 비판했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고려]]에서 개혁운동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까지는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사상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결사운동이 일어나, [[의천]]은 [[천태종]]을 통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지눌]]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의천의 방식은 불행히도 사상적인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 쉽게 말해 [[절(불교)|절]] 하나에 [[승려]]들을 싹 몰아넣었다. 진짜 그런 건 아니고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의 통합이었기에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지눌의 혁신 운동은 사상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지눌 이후에도 지속되며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사상적으로도 그 제자인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이어져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원 간섭기]]가 되자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계는 점차 사대적인[* 기존 왕즉불 사상에서 '''고려왕=부처'''의 권위가 고려왕이 아닌 원나라 황제에게 넘어가서 '''원황제=부처'''가 되었고, 원나라에서 계를 받은 스님들이 등장했으며, 고려의 거대 사찰들은 원나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귀족불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상종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되었고, 사원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관여하는 등 부패가 심화되었다. [[고려]] 말 대두하기 시작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폐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과거의 유학자들이 불교의 폐단만 비판했던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폐단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 의존했던 조선 사회의 전반에서 보여지는데, 불교에 대한 공격이 당시 조선의 본질적인 문제를 희석화하는 수단으로 쓰여진 셈이다.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윤리사상을 [[유교]] 윤리사상으로 전환시켜 국가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사찰에 예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재정으로 환수했다. [[문정왕후]] 등의 일시적인 숭불책이 수차례 있었으나 승려를 [[천민]]으로 대우하고 서울 등 도시 출입을 금지하는 등 [[숭유억불]]의 조류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계는 경제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상실하여 사회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신봉되었고 교리의 발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적인 양상 또한 역사가 깊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해치운 사람도 승장 [[김윤후]]였다.[* [[김윤후]] 본인은 자신이 [[살리타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조선]] 때 [[임진왜란]] 당시 [[휴정(조선)|휴정]]과 [[유정(조선)|유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 궐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결성된 승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유정은 이들 승군을 통솔하는 명목상 직책인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의 억불정책에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이전에 비해 억압하는 면모가 꽤 줄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대장경]] 역시 불교의 힘으로 국가를 구하려한 열망을 담은 호국적인 사업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져, 한때 불교 억제정책을 강화했던 [[정조(조선)|정조]]마저 나중에는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수원시|수원]]에 [[용주사]]를 건립했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승려]] 자체는 계속 낮은 신분이었기에, 사찰의 재물을 노리고 공격을 당하거나 아예 절을 빼앗아 [[무덤]][[남연군|을 만드는]] [[흥선대원군|경우]]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주장이 나왔는데, "조선시대의 호국불교는 당시 불교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정부의 전형적인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극히 반조선적 성향을 띠었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속칭 말하는 '이렇게 우리가 도와주고 나면 우리의 사정도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물심양면으로 조선 정부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 정부 측에서는 '오! 이런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나?' 하면서 [[승려]]들을 부역에 더더욱 많이 동원했다는 [[후새드]]한 후일담이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등으로 [[공납]]할 장인들이 모자라자 [[절(불교)|절]] 등에 공납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불교에 대한 조선왕조의 자세가 다소 완화된 건 [[임진왜란]] 전후라는 건 확실하다. 우선 상기한 대로 불교계가 조선왕조 수호에 한 몫을 한 것도 있고, 전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데는 전란을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양반들의 전유물인 [[성리학]]보다 전란에도 대중의 곁을 지키며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불교가 더 유리했고, 전쟁으로 조선을 포함한 주변 나라들이 죄다 갈아엎어지면서[* 중국의 [[명나라]]의 몰락과 [[청나라]]의 대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의 대두 등] 다른 최중요 과제들[* 국가 복구, 외교 정비 등]이 잔뜩 늘어난데다가, 이후 [[인조반정]], [[병자호란|양대]][[정묘호란|호란]] 등을 위시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등에 수차례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 조선 왕조가 불교 탄압에 예전만큼 신경 쓸 겨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이 마냥 불교를 억압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도 최근에 등장하고 있다. [[한국 불교의 역사]] 참고. 아무튼 이렇게 조선왕조에 억압받은 시기 때문에, 한국 불교에서는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행정이나 대외 부역 참여 등에 무게를 두는 사판승의 이원론적 체계가 생겨났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한국 불교에서는 각 [[절(불교)|절]]의 관리자가 2명씩 있다. 행정업을 맡는 주지와, 종교적 업무/승려 교육을 전담하는 방장이다.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라, [[조계종]]의 경우 행정업 전담인 총무원장과 종교적 업무 전담인 종정이 따로 있다. 일단 전조인 [[고려]]시대에 불교가 행했던 영향력과 악행들도 있고,[* 나라에서 빠른 공무 전달을 위해 배치한 역을 [[승려]]들이 멋대로 이용하거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살인적인 이자의 고리대를 걸거나, 심지어 불교에서 엄금하는 [[오신채]]를 재배해 팔기도 했다.] [[유교]]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택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취급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 예로 도첩제가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거액의 포를 바치거나[* [[세조(조선)|세조]] 때는 승과에 합격한 자도 30필이나 되는 포를 바쳐야 했다. 그냥 100~200필보다는 적지만 당시엔 30필도 거액에 해당되었다.] 부역에 몇 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도첩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엔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서, 부역 중에 죽은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숭유억불]] 정책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도첩제 자체가 양인의 승려화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승려]]는 [[세금]]을 안 내니까.''' 조선 건국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 [[승려]]는 천민계급 중 하나였다. 신량역천도 아니고 법제적인 천민도 아니지만, 성리학적 규범과 양반 사회가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도성 출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왕실의 원찰이나 승려가 도성에 들어온다고 승려 도성 출입 금령을 자주 내린 걸 보면 잘 지켜지긴 했는지 의문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구한말]] 시기로서, [[일본인]]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 [[일련종]] 소속으로, 지금의 [[도쿄]] 다이토구([[아사쿠사]]) 출신이다.]가 [[주한일본공사관|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통한 적극적인 로비로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 물론 이렇게 사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본 불교의 종지로 한국 불교를 개종시켜(일본 불교의 교리를 한국에 심어),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일련종이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정부는 [[봉원사]]의 승려인 [[이동인]]의 건의로 이미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를 논의 중이었다. 그런데 공로는 다 사노에게 넘어갔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 셈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 이동인이라는 승려부터가 일본식 불교 승려[* 조선식 승려로 귀의를 했지만 1879년부터 일본 정토진종(眞宗)의 승려로 법계를 받았다.]로, 개화파 중에서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또한 최초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로 일본 이름은 아사노 도진(淺野 東仁).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밑밥 깔기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후 1898년 [[고종황제]]가 [[원구단]]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겁도 없이 주위를 둘러 친 장막의 틈새를 열고 들어와 "초능력으로 황제의 운명을 점치겠다"고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잡아서 문초를 하니 개운사 출신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 외는 미상이다. 이 사건으로 3년 만에 승려 출입이 다시 금지되었고, 이후 실질적으로 승려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은 흔히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부터가 [[숭유억불]]을 내세웠으며 불교를 논리적으로 공박한 '''[[불씨잡변]]'''을 쓰기도 했다. [[태종(조선)|태종]]은 특히 불교를 혐오하여 불교 종단의 해체, 파괴를 시도했다. 많은 절이 폐쇄되었으며, 심지어 유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산 속에 숨어있는 절까지 올라와서 깽판을 부리거나 불태웠다.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기거했던 [[회암사]]조차 고의적인 테러로 불태워졌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왕실]]뿐이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손이 귀해지자 왕실은 불교에 기대었고, 신하들도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 [[영조]]의 경우 아들이 안 태어나자 신하들이 불사를 권하기도 했다. 왕실의 여성이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인 신앙심이 불교를 유지해주었다. 나름대로 불교를 믿었던 [[태조(조선)|태조]], [[세종대왕]], [[세조(조선)|세조]], 많은 [[왕비]]들의 비호 아래 암암리에 왕족들[* [[효령대군]], [[정의공주]] 등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은 불교를 믿어왔으나, [[문정왕후]]를 마지막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왕릉 근처에서 왕실의 제사를 지내고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원찰이 딸려 있었다. [[선비]]들이 평범한 절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 들어가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네놈이 감히 왕실을 능멸하느냐?!"고 불호령을 당하고 곤장을 얻어맞았다. 비슷한 것으로 조포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왕릉 근처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사]]가 있을 때 제수 용품으로 쓸 [[두부]]를 마련하는 사찰이라 해서 두부 포 자를 써서 조포사라고 불렸다. 이 역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기에 선비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수원시]]에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고 보관하는 수호사찰이 있었다. 봉화(奉化)의 각화사(覺華寺),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 내에 위치한 안심사,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를 말한다. 이 수호사찰의 경우 주지승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병부를 갖고 있어 유사시 실록 수호를 위해 지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실무직이었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들이 유생들의 탄압을 피하는 일종의 편법으로 태조 [[이성계]]를 절에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유생들이 멋도 모르고 절에서 행패를 부렸다가 [[승려]]들이 "아이고오 즈어어어언하아아아아~" 하면서 어진이나 위패 앞에서 향피우고 통곡하면 유생들은 그저 데꿀멍 + 상소가 올라가면 왕실 능멸로 처벌 크리다. 이게 생각보다 잘 먹혀서 나중에는 태조 [[이성계]]를 사찰이 모시는 사찰이 지나치게 늘어나 나라에서 제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모신다는 점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도 다 쓸어버리자니 께름직하기도 하고 알아서 건국자를 모시고 받들어 주니 나름 기특하기도 한지라 작은 절 몇 군데 시범 케이스로 조금 단속하는 선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았다. 대구 [[파계사]]의 경우 절의 주지였던 용피가 당시 [[숙종(조선)|숙종]]이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린 것에 전답으로 보상받는 대신 절에 '''선대왕의 위패'''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용피의 말대로 태어난 왕자가 [[연잉군]]이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실제로 파계사에 모셔진 목조관음상 안에서 '''[[영조]]가 입던 도포'''가 발견되기도 했다. 파계사 앞에는 지금도 '대소인개하마'[* 신분이 높든 낮든 이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라.]라고 새긴 하마비가 남아 있다. 위패를 모셨던 전각은 기영각이라고 해서 지금은 평범한 불당이다.[[http://m.imaeil.com/view/m/?news_id=40356&yy=2007|#]]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유학자 입장에서 [[불교]]에 비판적이었으나, [[한글]]로 [[불경]]을 많이 지었다.(심지어 2번째 한글 작품은 불은(佛恩)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또 세종대왕 당시에는 세종의 작은형 [[효령대군]]이 불교를 많이 후원하였다. [[세종대왕]]의 차녀 [[정의공주]]와 그 남편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세조(조선)|세조]]는 드물게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불교를 많이 밀어줬다.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보살와 관련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성종(조선)|성종]] 때 한 번 날아갔다. [[연산군]]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다 괴롭혔기 때문에 불교도 된서리를 맞았다. [[원각사]]를 헐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 문제는 연산군 이후에 유학자들의 입김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게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몽둥이로 패서 내쫓고 7~8명의 젊은 비구니를 겁탈한 이야기도 있다. 겁탈의 배경이 되는 정업원(淨業院)이란 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족 부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연산군의 일은 한마디로 자기 친인척을 겁탈했다는 이야기다. [[명종(조선)|명종]] 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보우(조선)|보우]]를 [[무학대사]] 이래로 비어 있었던 국사 자리에 임명하는 등 강력한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그러나 [[문정왕후]] 개인에게 의지한 불교 진흥은 한계가 있어서, 문정왕후 사후에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정조(조선)|정조]] 같은 경우 초기에는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강하게 장기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수원시|수원]]에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을 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후원하였고, 부모은중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경전.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없었다. 불교 반대파들이 "저 인간들은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데 부모를 버리는 거 아님? 저거 불효임" 이런 식으로 공격하자, 불교 측에서 이에 맞서 "아니다, 우리도 [[효도]]를 강조한다."는 취지로 지은 경전이다. 게다가 [[유교]]에 비해 우월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기 위해 "유교는 한 명의 부모님을 중히 여기지만, 우리는 만인의 부모를 중히 여긴다!"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위경이기는 한다. [[위경]] 참조.]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절(불교)|사찰]]이 어느 정도 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완전히 쫓겨났지만 민간 신앙적으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셈이다. 그리고 [[부녀자]]들 측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은 깊었으며, 이는 심지어 사대부 부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던 규방소설 같은 작품들을 보면 사대부 남성들은 기를 쓰고 불교를 반대하지만, 여성들은 그 신앙을 존중하거나 직접 믿는 한편 [[절(불교)|절]]에 불을 지르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대부들을 그리는 등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치제도상으론 열심히 억제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신자가 많았던 셈. 하지만 이전 시대와 달리 유력 귀족이나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조선 후기의 큰 절들은 절의 유지와 확장 등을 위한 돈을 주로 신자들의 시주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서 기복신앙 행위의 증가와 무속과의 결합이 커지는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다. 이 문제는 불교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 전파된 타 종교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