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붕당 (문단 편집) ==== 숙종의 [[환국(조선)|환국]] 정치부터 [[이인좌의 난]]까지 ==== 이후 [[숙종(조선)|숙종]] 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조선)|숙종]]의 [[환국(조선)|환국]] 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s-2]], [[연좌제]]의 처벌(극형)을 받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로 붕당이 변질되어 일당 전제화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유배도 가벼운 유배가 아니라 무거운 유배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숙종(조선)|숙종]]의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애초에 붕당이 제대로 불 붙은 이유가 선조의 왕권 강화 노력도 한몫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험한 불장난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편당적 인사 조치로 강한 붕당을 견제하여 붕당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환국 정치 역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숙종 말기 여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 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론, 소론으로 분당된다. 이는 송시열이 자신의 주장을 오락가락하면서 줏대없게 행동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당시 경신환국이 가능하였던 것은 오로지 척신 [[김석주]]에 공이었으니 기성 서인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했다. 거기다가 문제가 터진 이유가 남인들 공격을 조작하다가 들킨 사건이기에 남인들로부터 역적이라고 공격당한 송시열은 덮을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이 이때 송시열에게만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고, [[윤증]]과 [[박세채]]에게 동일하게 물어 본 것인데, 나중에 소론이되는 이 두 사람은 원론적인 주장만 하였을 뿐 특별하게 송시열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한것도 없는 것이다. 한편 척신 김석주는 사실상 당시 숙종의 대리인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런데 정작 직접적으로 걸린 사람만 비판하였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처음 송시열도 원론적으로 듣고서는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다만 걸린 사람이 자기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라는 것만 아니였다면 [[윤증]]과 [[박세채]]처럼 할 수 있었다. 한편 김석주가 1684년에 죽으면서 민유중과 김만기가 실세가 되었으나 민유중과 김만기도 1687년에 별세한다. 그리고 노론, 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고 [[갑술환국]] 이후에 주류가 되지만 숙종은 권신화가 되는 것을 싫어해서 노론을 지원했고, 점점 노론이 대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론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했다. 숙종의 지원 속에 노론이 병권과 [[정승]][[판서]]를 차지하면서 소론의 힘이 약화되더니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소론을 지원해서 노론을 견제했다. 그러면서 [[경종(조선)|경종]]을 싫어했고 [[영조|연잉군]]을 몰래 왕위계승권 안에 올리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했다. 1720년에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올리고 대리 청정까지 요구했으나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세운 다음, 대리청정을 거부하여 노론이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이유 아래 오히려 노론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여기에 1722년에 [[김일경]]의 지원을 받은 [[목호룡]]의 삼급수(三急手) 고변으로 노론의 신하들은 줄줄이 유배당하거나 사형을 당했다.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고 소론 쪽에 줄을 선 남인들이 제법 벼슬을 얻으면서 남인도 잠시 부활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한편 소론 중에서 강경파는 경종의 죽음을 "연잉군이 게장과 생감을 올려 경종을 위독하게 해서 사망했다."라는 [[경종 독살설]]을 널리 퍼트려, 반란 분위기를 조성했고 때마침 김일경과 목호룡이 사형을 당하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상황을 주시했던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해서 노론과 소론의 권력을 견제하며 소론 강경파의 반란 분위기를 잠재우려 애썼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소론 강경파는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지만 소론이 집권한 까닭은 바로 노론이 임금을 농단하고 심지어 반역까지 저지른다는 이유로 집권했는데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스스로 집권 명분을 저버리는 행위에 가까웠다. 물론 이인좌의 난은 경종 독살설을 통해 난을 일으켰음으로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론 온건파인 완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서면서 결국에는 실패했다. 한편 인조반정 이후 밀렸던 영남에는 이인좌의 난 이후 단단하게 쐐기를 박았고 100년이 더 지난 이후에야 철폐되는 대과응시 금지령이 내려져서 영남 남인들은 조선 정계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3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