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붕당 (문단 편집) =====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 조선시대 붕당은 미개한 당파 싸움, 파벌 싸움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잦다. 겉으로는 일치 단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독재]] 국가, [[일당 독재]] 국가에서도 파벌과 대립은 존재한다. 이것은 정치의 속성 때문이다. 한 국가와 조직이 가진 자원, 노동력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원, 노동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조직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부른다. 현대 국가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경제 성장에 역점을 두어 나눌 파이를 키우자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경제 성장 할 만큼 했으니 사회적 빈부격차를 줄이고 전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고 주장하는 경우가 이것이다. 결국 인간 사회는 재화(자본)와 인간의 삽질로 굴러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떤 정치 체제를 가졌든, 인간 사회의 정치는 힘의 논리로 굴러간다.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로 상징되는 쪽수이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확보한 유권자의 수가 곧 정치적 파워로 연결된다. 독재 체제에서는 힘을 독점한 독재 세력에 의해 비교적 쪽수의 영향력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쪽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힘 없는 민중인 것처럼 보여도 쪽수는 힘이기 때문이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열강]]들도 마냥 식민지를 총칼로만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열강에 빌붙는 부역 세력([[매국노]])을 키워 정치적 파워를 늘렸다. '''그러므로 파벌과 붕당의 형성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붕당정치라고 해서 더 욕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고 무조건 한국사를 깎아 내리려했던 식민사관이나 정당 정치를 파벌싸움으로 매도하려던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볼 여지도 있다. 다른 전근대 국가들의 위정자들의 통치나 파벌싸움의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와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모습이 많았다. 조선시대는 위정자나 왕조차 욕심많은 토호세력이나 무식한 무인들이 아닌 수신하며 군자를 표방하는 학자의 나라였고 이런 모습은 전근대치고는 우수한 모습이였다. 오히려 조선의 붕당정치가 훨씬 양호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 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로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인은 단결을 못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벌 싸움의 극단성이 정말 붕당 정치에서 유독 특별하게 강하게 나타나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칼부림은 안 난 붕당 정쟁이 더 온건해 보일 정도. 어느 나라나 정당과 같이 정치 집단의 의견이 갈릴 경우 엄청나게 싸웠다. 다만, 조선시대의 붕당을 비웃었던 그 일본 역시 사정이 낫지 않다.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바타 카츠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두고 대립한 것은 파벌싸움이 아니란 말인가? 차라리 조선은 조정 내에서 신하들이 파벌을 두고 싸웠지, 일본에서는 [[다이묘]]들이 조정과 [[천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총칼들고 싸웠다. 일본이 문명국이라고 자칭하게 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달랐을까?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운 [[조슈]]와 [[사쓰마]]도 정권을 잡자 자기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싸우기 바빴고, 이것은 [[세이난 전쟁]]과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이어진다.''' [[일본 제국 육군]]은 조슈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일본 제국 해군]]은 사쓰마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해군 내에서는 멀쩡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육군의 경우 [[황도파]]와 [[통제파]], [[만주파]]로 나뉘어 육군 내부에서도 파벌 싸움이 이어졌고, 결국 통제파가 이기면서 희대의 전범이자 추물인 [[도조 히데키]]가 집권한다. 해군 역시 크게는 조약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는 파벌로, 일부는 [[추축동맹]]에 반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있다. [[진주만 공습]]을 지휘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이소로쿠는 미국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 2022년 시점에서 보면 그나마 정상적인 파벌이다.] 함대파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웠다. 육해군에서 대표적으로 큰 파벌이 저 정도이며, 그 와중에 또 병과끼리 파벌을 이루어 싸웠다. 소위 [[삼간사우]], [[삼대오물]] 같은 작자들이 이런 파벌 싸움 잘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고, 군 전체를 말아먹었다. 그나마 해군 내부 파벌 싸움이 육군보다는 좀 덜한 편이었다. 이런 파벌싸움의 결과, [[밀리환초 학살사건]]같이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잡아먹겠다는 너무한 일을 벌였고, 마침내 일본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핵폭탄 2방]]과 [[옥음방송]], [[인간선언]]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이 조선시대 붕당에 대해 평을 할 자격은 없다고 본다. 비슷한 근세의 유럽 왕정 국가들의 경우는 [[장미전쟁]], [[위그노 전쟁]], [[잉글랜드 내전]], 천날만날 일어나는 지방 귀족 세력의 사주를 받은 민란, 암살, 그나마 좀 양지에서 벌어지는 경우인 [[결투]] 등, 지배 계급간의 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이 일찍 과두 정치가 자리 잡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법외에서 진행되는 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통제된 문투, 그것도 조정이라는 공식 국가 기관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사약을 사하는 것은 보다 온건하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왕정보다 앞선 민주정조차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치룬 적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나마 [[이괄의 난]] 같은 조선 내부의 내전이라 부를 만한 정치 투쟁은 비슷한 시기의 십만, 백만 단위로 희생자를 수십년에 걸쳐 쌓은 [[위그노 전쟁]]이나 영국의 [[삼왕국 전쟁]], 등 성리학권 외부 근세 국가의 내부 정쟁에 비하면 훨씬 더 빨리 진압 되고 안정화 된 편에 속한다. 이 또한 '저런건 종교 전쟁이니 예외로 쳐야 하지 않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구교와 신교의 유혈낭자한 대립도 큰 무리 없이 지배 계급의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경우를 보면 종교 자체보다 봉건 귀족제와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과도기에 있었던 근세 유럽 왕정 국가들 정치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그 정도 스케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설명하는 학술적 테제가 휴 트레버-로퍼, 존 헉스터블 엘리엇과 그 제자인 제퍼리 파커 등의 역사학자들이 명명한 '조정과 나라의 대립 (court versus the country)' 이론이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신교냐 구교냐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고, 종교 갈등의 핵심에는 갈수록 비대해 지고 권력과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과, 봉건제로부터 내려오는 특권과 지방 자치를 유지하려는 토착 귀족, 자유 도시, 대학 등의 '주변부' 기관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