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텔리우스 (문단 편집) === 황제 즉위와 몰락 ===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비텔리우스는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다루고 성격이 워낙 좋은 덕에 인망을 얻었는데, 69년 초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라인 강 군단병들[* 라팍스 제21군단, 알라우다이 제5군단]에 의해 [[쾰른]]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대박이 터졌다. 그리고 천운이 따랐는지 몰라도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이티아 주둔 군단들에게도 지지선언을 받으면서 반 갈바 운동의 새로운 황제로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비텔리우스는 황제감이 아니었고, [[네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을 뿐 네로보다도 훨씬 못한 위인이었다.'''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니나노하며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열매만 따먹는 전형적인 윗분의 행태를 보이며, "갈바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로마 여행길 동안 그는 환락과 축제, 술파티에 몸을 맡겼고, 수행원들과 병사들 역시 비텔리우스와 함께 무질서함 속에서 진군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갈리아에 남아 있다가 부하 장군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크레모나 전투에서 오토를 운좋게 이긴 직후에야 이동했다. 도중에 루그두눔에서 아내와 자녀들과 대면한 뒤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비텔리우스의 아들)|아울루스 비텔리우스]]에게 지휘관이 착용하는 망토를 씌우고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내리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비텔리우스는 6월 말경에야 로마에 수행원들과 함께 개선하며 입성했는데, 사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가 자살한 다음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상태라서 많이 늦게 귀환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고 소금을 뿌리는 행태를 보인다. 오토를 따랐던 도나우 군단[*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 [[13군단 게미나|게미나 제13군단]]] 병사들을 용서하기는커녕,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병사들을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키는 어이없는 짓을 했다.[* 대대장급 이상이라면 애초에 신분이 다른 사람이 많기 때문에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백인대장은 거의 대다수가 고참병으로 밑에서 올라간 자들이었다. 또한 전장에서 지휘를 하면서 같은 대열에 서서 군단병들과 같은 사선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군단병을 노역에 투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유지를 위한 가도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구축에만 투입할 수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나라를 위해 군단 장병들이 전쟁이나 훈련이 없고 휴식도 충분히 취한 뒤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어서 노예처럼 작업을 강요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특히 원형경기장은 기본적으로 검투사들이 생사무관 결투를 하거나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으로 별 가치가 없다는 건 당대에도 상식이었고, 돈을 들여서 짓거나 개인이 기부하면 노예를 동원했다. 그런데 이걸 군단병들에게 지으라고 강요했다는 건 한 마디로 '''이들을 노예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크레모나 주민들의 구타와 모욕을 막아야 할 비텔리우스 휘하 군단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서 놀고 있었으니 그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당연히 이때 공사를 강요당한 군단병들은 훗날 크레모나 주민들은 물론이고, 비텔리우스파 포로들까지 마구 학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심지어 자신 휘하 군단이 도나우 군단을 이긴 지역을 시찰하고 했던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군'''과의 전투 현장을 둘러보며 당연하지만 이 적들은 도나우 군단. 문제는 이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곤 하나 이 자들도 같은 로마인이자 로마군이었기에 상당히 문제가 큰 발언이었다. 따라서 내전 수습에는 평상시보다 더 고난이도의 정치력을 발휘해도 모자랄 판에 이 말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당연히 비텔리우스와 크레모나 시민들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분노는 깊어졌다. 비텔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돌아와서 오토의 형 살비우스 티티아누스를 사면시켜 주고, 오토 측 인사들에게도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곤 계속해서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로마에 와서 근위대를 해고하고 자신의 라인 강 군단 병사들로 근위대를 새로 꾸렸다. 하지만 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반발하게 만들어 적으로 돌리는 행동이었고, 뒷수습도 말끔하지 못해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 이후 비텔리우스는 대놓고 네로를 찬양하고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책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로마의 돼지”라고 불리는 별명답게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폭식에 탐닉'''[* 로마 귀족들이 배가 부르면 음식을 강제로 토하고 다시 먹는다는 유래의 원조가 다름아닌 이 사람이다.]하며 국정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래부터 느긋하고 게으른데다 성격 역시 좋은 집안 출신답지 않게 방종한 사람인터라, 로마 귀환 후 한 일이라곤 각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 탐닉에만 치중했다. 또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섹스틸리아에게 [[불효]]를 저지르고[* 폭식만 일삼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는 걸 보다못한 어머니가 제발 국정 좀 돌보라고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내전 당시부터 위의 향기 발언처럼 잔인하고 생각없는 말을 대놓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텔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 증오심에 불타던 도나우 군단이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면서 비텔리우스는 단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무키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는 대신 유대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비텔리우스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무키아누스는 로마로 진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도나우 군단이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하에 무키아누스에 앞서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가 보낸 진압군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도나우 군단이 승리했고 비텔리우스편의 총사령관이었던 카이키나마저 도나우 군단에 사로잡히면서 비텔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