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빨갱이 (문단 편집) === 기원 ===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빨갱이'라는 말이 퍽 유행된다. 이것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인데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빨간 놈이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거죽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토마토나 고추 모양으로 안팎 속이 다 빨간 놈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빨간 놈인 것은 몰라도 토마토나 고추 같은 빨갱이는 소아병자일 것이요.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의자일 것이요. 진짜 빨갱이는 수밀도같이 겉과 속이 다 희어도 속 알맹이가 빨간 자일 것이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자 과거 [[반공주의]]의 산물. 근래에 들어서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종북세력'으로의 순화가 권고된다. 본래 공산주의자들을 비칭하는 말이었지만, [[냉전]] 및 독재시대 때 정치적 반대자 및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사회에서 다방면으로 매장하는 낙인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으나 요즘은 '종북'이라는 말로도 쓰이곤 한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비난할 때는 '[[반동#s-2|반동]]'이라고 부른다. 위의 독립신보를 보듯이 빨갱이라는 단어는 1947년에도 쓰였던 만큼 그 역사와 용례가 오래되었다. 광복 직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전 약 한 달의 공백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s-1|인민위원회]]는 무장 상태인 일본군과 일본 경찰을 상대로 최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로부터 치안권 및 행정권을 넘겨받아 행사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일본군이 물러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 속에 숨죽이며 살아갔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본군 및 일본인을 일본으로 송환한 후 국내 사정은 돌변했다. [[미군정]]이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행정권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민족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사회주의는 경제적·지위적 불평등이 없는 사회,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대표적인 정치사상이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이다. 공산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노선으로, 인민과 노동자가 [[계급투쟁]]을 통해 자신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권력자와 자본가를 타도하고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사유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고,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급격하게 무너뜨리지 않고 [[의원내각제|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복지를 실현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세도정치]]기에 이어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권력자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누구보다도 조국을 생각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한 경우가 많다. 예시로 공산주의 계열은 강창보, [[김단야]], [[김무정]], 김재봉, 구연흠, 권오설, [[이동휘]], [[이재유]], 임원근, [[허헌]]을, 맑스주의 계열은 [[김원봉]], [[백남운]]을, 사민주의 계열은 [[김약수]], [[여운형]], [[장건상]], [[조동호]], [[조봉암]], [[조소앙]], [[홍명희]]를 들 수 있다.][* 현재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자칭하고 있는 [[북한]]이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들을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용어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민주주의의 반대 용어는 [[독재]]와 [[권위주의]]이고 공산주의는 엄연히 자본주의와 대립되는 용어이다.][* 물론 공산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면 경제적 이익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국가가 모든 토지와 생산수단을 몰수하게 되고, 국가 지도자에게 강력한 중앙 권력이 집중된다. 거기에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다보니 개인의 시장이 없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이 특징인 만큼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수익도 똑같기 때문에, 국민들의 생산 의욕이 저하되어 국가의 경제가 침체된다. 결국 엄청난 권력을 지닌 지도자가 국민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면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변질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한 이론일 뿐 이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단순히 '민주주의<->공산주의=독재'라고 생각한다면 이전에 언급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독재를 원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정말 그분들이 독재를 하고 싶을 만큼 부와 권력을 탐냈으면 친일파가 됐어야 했다.''' [[주체사상|김일성이 원하던 사회주의]]와 [[이상향|그분들이 원하던 사회주의]]는 엄연히 달랐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을 배제하고 기존 일제의 총독부 및 지방관청에 근무하던 공무원, 친일 경찰, 일본군 등을 요직에 그대로 기용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은 군정 고문 대부분을 친일파 출신이 많은 [[한국민주당]][* 여기에서 한국민주당이 현대의 [[민주당계 정당]]과 같은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 것이, 한국민주당이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라고는 하지만, 이는 정당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 크고, 사실상 현 민주당계의 직접적 전신으로는 1990년대 창당한 [[민주당(1991년)|민주당]]이나 [[새정치국민회의]]를 많이 꼽는다. 애초에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다를 바 없는 '''보수 성향의 정당'''이었다.]에서 충원하였는데, 특히 '''일제 하에서 경찰로서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자들 중 80% 이상이 미군정 경찰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때 기용된 대표적인 군인, 경찰 출신 인물로는 [[김종원]], [[김창룡]], [[노덕술]], [[백선엽]], [[송요찬]], [[원용덕]], [[유재흥]], [[이종형]], [[이형근]], [[정일권]], [[채병덕]] 등이 있다.[[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num=49484|#]] 이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6.25 전쟁]]에서의 [[양민학살]]에 크게 관여한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에게는 효율적인 한반도 통치가 유일한 목표였고, 한국을 잘 알지 못하던 그들은 친일파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앞장서며 익힌 행정경험을 권력행위의 말단을 구성하는 데 동원한 것이었다. 이는 미군정이 광복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항복 조인식을 끝낸 [[존 리드 하지|하지]] 중장이 제일 먼저 벌인 일은 항복문서 제5항 제1호를 통해 총독부의 존속과 관료들의 유임을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는 미군정 초기부터 기자들에게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사람은 일본인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거기에 더해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을 '준 우호적' 또는 '해방된 국민'으로 대우하라는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장군과 [[조지프 스틸웰|스틸웰]] 장군의 조언도 무시하고 휘하 장교들에게 한국인을 '준 적국인'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 고문이었던 랭던은 한국인에게 분열, 아첨, 과도한 이기주의, 강력한 대립, 아량 부족 등이 있다며 혹평을 해댔다.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일본의 탓이 컸는데,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패전 후 오키나와의 미 24군단에 한반도 상황을 타전하면서 남한 사회가 공산주의 세력에 물들어있다거나 치안 질서가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있다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김영택, 2009, <친일세력 미 청산의 배경과 원인>, <한국학논총> 31, 502~516, 524쪽 참고.] 이런 왜곡된 인식 속에서 미군정이 믿을 만한 건 일본인에 가장 가까운 친일파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신탁통치 오보사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으로, '''실상은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제안했고 이와 반대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소련이 정의로운 국가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면 1945년 말 당시 한반도는 좌익세력이 우익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했고, 지리적으로 봐도 한반도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대륙으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데 딱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은 한반도보다 [[중국]]의 공산화에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으로 인해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세력들은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인 우익[* [[김구]]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진영은 미소 양군을 철수시키고 한국이 자주독립하여 한반도의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승만 및 한국민주당 진영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소련과 탁치에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의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통해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4개국이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하고, 그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완전한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다.]이 한반도의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좌익[* 여운형을 비롯한 [[조선인민당]] 진영은 3상회의 결정을 수용하여 한반도의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진영은 한국의 해방은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국제적인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신탁통치를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으로 나뉘어졌고, 이에 따라 [[노덕술]], [[김종원]] 등 미군정에 기용된 친일파들은 매국노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미국을 따르는 우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방해되는 좌익이나 단독정부 수립 반대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일례로 악질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은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을 체포해서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주고 그의 뺨을 때렸고, 악질 친일군인이었던 김종원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동료들을 모아 평화적인 무력시위를 계획했던 조문기[*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부민관 폭탄의거]]를 결행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그는 단독정부 반대 시위로 인하여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것도 모자라 이승만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그래서 이승만 암살 및 정부전복 음모 사건의 배후로 몰려 또다시 고문을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이후 민문연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전념하였으나, 골수종과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사망하였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0912&cid=40942&categoryId=34454|#]]]에게 주모자 내부에 침투한 프락치를 명분으로 조문기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했다. 그렇게 친일파 출신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 [[서북청년단]], 그리고 친일 군경은 이승만에 협력하게 된다. 당시 우익의 중심 인물로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을 꼽을 수가 있었는데, 김구와 김규식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친일파 청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친일파들과는 성향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만큼 명백한 친미세력이었고, 1945년 12월 17일 방송을 통해 "공산당과 타협은커녕 애국자면 누구나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한다"고 말한 명백한 반공주의자였으며,[[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1_1945_12_17_0070&position=-1|#]] 1946년 11월 연설에서는 "친일파 문제는 우리 환경이 해결할 수 없으니 극렬 친일분자라도 기회를 주어 민족에게 복리될 공효를 세우게 되면 혹 일후에 장공속죄할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만큼 친일파 청산에도 비협조적이었기에 이들은 이승만에 협력하게 된 것이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3_1946_11_11_0060&position=-1|#]] 기회주의자, 악덕 지주, 친일파, 매판자본가의 정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한민당에게 이승만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을 최고의 간판이 되어주었다. 이승만 역시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규식, [[안재홍]]의 국민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항해 자신이 없는 국내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한민당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받음으로써 다른 독립운동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이승만과 한민당의 상호 협력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 및 초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