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빨갱이 (문단 편집) === 역사와 용례 ===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즘|아나키스트]], [[사회민주주의|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 >- [[채만식]], 『도야지』, 창비사 '문장' 27호, 1948년 10월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 >-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본문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는 공고해져 갔다. 친일파 처벌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여 노덕술을 검거하는데,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이었던 친일파들을 보호하고자[* 실제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노덕술은 기술자이므로 국내 치안의 확보를 위해 석방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1800209201001&officeId=00020|#]]]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국회 프락치사건]]에 엮어 구속시킨다. 그러자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청사 앞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애국지사를 잡아간 반민특위 위원들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하며 시위를 벌였고, 결국 반민특위는 해산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6&aid=0000082299|#]]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도 모자라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던 친일 군경이 대한민국 군경에 그대로 유입되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일본군과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특별고등경찰]]의 반공 구호가 일부 수정되어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군 군부는 [[방공 협정]] 체결을 추진할 정도로 반공주의자들이 매우 많기도 했었다. 어쨌든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인한 반민특위의 실패는 민족반역자 처단을 무산시켰다.[* 그래서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을 비판할 때 ''''친일독재''''라는 표현도 종종 쓰인다. 당시 독재정권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 및 후손들이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무조건 '보수 = 친일반민족행위자' 공식을 들이대며 보수진영을 비난 내지는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부분은 고찰이 필요하다. 이전에 언급했던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김병로]], [[김창숙]], [[장준하]], [[조만식]], [[최능진]]은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주창한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 없는 자주독립을 위해 또는 공산주의가 결국 독재체제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해 반공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다만 위와 같은 인물들이 현대 [[대한민국 보수정당]]과 같은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 것이, 위와 같은 인물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반면에,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대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성향은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신보수주의]]에 더 가깝다. '''실제로 김구, 김규식, 김병로, 김창숙, 그리고 최능진은 이승만과, 장준하는 박정희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또한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도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을 비판 혹은 부정하는 움직임이었기에 정부는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또한 이 사건들에 공산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용해 '공산주의의 해악성'을 널리 선전했다. 특히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를 구축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군대 내의 반정부 반란은 정부를 경악시켰고, 사건 진압 후 이승만은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말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군대 내에서 [[숙군|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고,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들의 만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빨갱이=사람이 아닌 존재'처럼 상정됐다.[* 이런 논리는 결국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 당시 국군과 우익에 의한 숱한 민간인 희생에 주요한 정당화 기제로 작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빨갱이'라는 말은 소위 죽여도 되는 사람을 만드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 영화 [[실미도(영화)|실미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울 땐 '빨갱이의 소행'이라 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유감스럽지만, 이런 '정치적 포장'은 빨갱이란 단어가 생기기 한참 전에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바깥의 적과 내통한 반역자'로 몰려 고통받거나 죽은 사례가 꽤 된다. 물론 정말로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지만, 안 저지른 사람도 있음을 잊지 말자. 실제로 정부는 실미도 사건 때 실미도 요원들을 [[무장공비]]로 묘사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은 '빨갱이의 선동'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을 조직하고 중도~좌파 계열 정치인들을 반강제적으로 가입시켰고,[* 좌익진영에 있으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은 사상을 바꿀 의사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철회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거의 강제적으로 가입시켰다 봐도 무방하다.] 가입 숫자를 늘리기 위해[* 보도연맹 가입자가 많으면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지역이나 집단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가입자들에게 고무신과 같은 생필품을 나누어주고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우선 배급해서 좌파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주민들도 가입하도록 유도하고서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북한군에 협력할 수 있다는 명분을 들어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독재정권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을 향해서도 '빨갱이'라는 단어를 남용했다.''' 당장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인한 반민특위 파괴, 그리고 숙군이 정부 수립 직후에 발생했다. 이 일로 반(反) 이승만 세력과 소장파가 정계와 군대에서 대거 제거되었다. 전쟁 중에는 김구의 독립통일정부 수립노선을 따랐던 전호극 소령을 여순사건에 연루되었다고 거짓 혐의를 덮어씌워 살해했고,[[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18|#]] 친일파 청산과 평화통일을 신조로 삼던 [[최능진]]을 정부 수립 직후에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처벌했다가 6.25 전쟁 중에는 끝내 처형했다. 1959년에는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평화통일, 영세중립국가, 사회민주주의식 개혁'을 주장했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비단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유신 독재 및 군사 정권 때는 [[인혁당 사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 있었으며, 기타 묻히고 잊혀진 사건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정치권력 독점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처형하거나 학살하기 위한 명분으로도 '빨갱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대표적인 예로 미 군정 때는 [[제주 4.3 사건/전개#s-4|제주 4.3 사건 당시 양민학살]], [[여수·순천 10.19 사건#s-6|여순사건 당시 양민학살]], [[6.25 전쟁]] 중에는 [[보도연맹 학살사건]],[[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이 있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동백림 사건]], 이수근 이중간첩 사건, 서창덕 납북어부 간첩사건, 김복재 조총련 간첩사건, 박춘환 납북어부 간첩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문인 간첩단 사건, 형제 간첩단 사건,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정규용 납북어부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는 [[5.18 민주화운동/학살|광주 학살]], [[부림사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깃발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위와 같은 [[공안사건]]의 담당자들은 혐의가 옅거나 억울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허위자백서에 사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고문 담당자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근안]]과 [[정형근]]이 있다.[* 이근안은 자기 고문 대상자가 처음부터 용의자가 아니라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범인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자백하도록 하는 데 온 힘을 다했고, 정형근은 용의자를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데 달인이었던 관계로 수사기관에서 사랑받은 인물이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는데 [[용의자]]와 [[범인]]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용의자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법적으로 인정된 사람이다.]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과 [[전두환]] 시절에는 위와 같이 독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교육과 [[반공 영화]] 및 [[반공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하고 북한이 겉으로만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독재로 규정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반공교육의 영향을 받은 노년층들에게는 '나 때는 북한에 사람이 안 사는 줄 알았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고, [[박사모]]와 같은 극우단체의 주요 연령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독재정권을 반성해야 하는 이유로 인용되며,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반공교육의 폐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정책으로 인하여 훗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단어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일례가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용어 선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다.] 한편 '''이렇게 빨갱이로 정의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참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헌법에서조차 폐지된 [[연좌제]]도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당장 앞에 언급했듯이 고문과 가혹행위는 기본이었고 학살과 사법살인, 심지어 [[사적제재]]까지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살아남거나 풀려났다고 하더라도 공안기관의 감시를 줄곧 받아야 했다. 또한 자식들과 친척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이들도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승진, 포상, 등용 등에 불이익을 받았고 결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쩌다 어른]] 135화(당시 강사는 심용환이다.)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죽은 피해자의 유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했다고 한다. 늘 군인들이 따라다니며 감시해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한데다 자식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란 이유로 심한 왕따를 당했다고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그 빨갱이의 자식이라 알려진 아이를 철사로 묶어놓고 돌을 던지거나 목에 철사를 감고 개처럼 끌고 다니는 등 괴롭힘의 수위가 단순한 애들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