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기타 == >[[효종(조선)|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07_004|어제장헌대왕지문]] *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무예를 익혀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할 만큼 건강했다고 기록한다. [[봉림대군|효종]]이 가지고 있던 [[청룡언월도]]를 15세에 들어 놀랍다는 기록이 아들인 [[정조(조선)|정조]] 시절에 남아 있고 대리청정 시절 [[무예도보통지]]의 기초가 된 무예신보를 편찬할 정도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실망감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잡학과 무예에 능하다는 이유였지만 신체는 강건했을지라도 정신은 병약했다.[* <[[한중록]]>에서도 "덕성(德性)이 거룩하나 과묵하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유년기부터 성인 때까지 두려운 아버지의 극심한 질책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살면서도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의 사이에서 일찍이 2남 2녀를 터울로 두었으며 아버지의 핍박과 본인의 정신병적 행각 속에서도 여러 궁녀들을 취하여 무사히 성장해 봉작된 기록이 남은 서손들만 또 3남 1녀를 두었다. 일각에서는 역설적으로 이 아들들의 탄생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보기도 하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대체할 또 다른 적법한 후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는 것인데 조선 중후기에 들면 선대의 삼대왕인 '삼종'의 혈맥을 모두 이은 후손이 정말 드물었던 관계로 영조도 생모의 출신이 한미함에도 불구하고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을 이어받았다는 논리로 즉위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도 유일한 형 [[효장세자]]가 본인이 태어나기 수 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삼종 혈맥은 더욱 귀했다. 그런데 귀했던 삼종 혈맥이 사도세자가 일찌감치 정실과 후궁들에게서 여러 아들을 낳아 대체재를 충분히 갖추게 되면서 더 이상 귀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그대로 세자의 희소성에 의한 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종 혈맥은 정말 귀해서 효종(1남)-현종(1남)-숙종(3남) 식으로 이어졌고 숙종도 세 아들이 있었지만 자식을 본 아들은 하나뿐이라서 사도세자는 실질적으로 4대 독자나 다름없었다. 이러니 [[이인좌의 난]] 당시 이인좌와 그 무리는 무려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앉히려고 했을 정도였다. 허나 이렇게 왕가가 아슬아슬하게 대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라서 왕가의 대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운이 나빠 대가 완전히 끊겨 버리기 쉽다. 실제로 헌종이 죽어서 정조에서 이어지던 한쪽 대가 끊겨서 [[은언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고 그쪽도 끊겨서 이번엔 무려 [[인평대군]] 가계였다가 [[은신군]] 가계로 입양된 [[남연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다. 족보상으로야 좀 가까운 사이였지 혈통상으로 보면 매우 먼 지간이었다.] * [[비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체심비풍(體心肥豊, 뚱뚱하단 말)', '비대'하다며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이 무거워 다치기 쉬우니 걱정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궁에선 특히 [[인원왕후]]전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했다는데 "인원왕후께서 어린 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 저리 되었다"고도 탓하고 [[승정원일기]]의 영조 19년(1743년) 5월 3일 [[http://sjw.history.go.kr/id/SJW-F19050030-01800|기록]]에는 "[[파오후|세자가 숨을 쉴 때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람소리 같더라]].[世子鼻息有聲, 意或以爲風也。]"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http://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059429&memberNo=23850669|#]] 물론 이때는 '''그나마''' 걱정이라도 할 정도로 사도세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애정은 보였지만~~아이구 이 자식아 살 좀 빼라 살 좀 빼!~~ 사도세자가 좀 더 자라자 미워하게 되면서 아들의 용모에 대한 얘기도 더더욱 신랄해진다. 대신들 앞에서 "이 아이의 배 좀 보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난번 가마 탈 때 보니 가마가 좁아서 세자가 탈 수 없었다. 그 가마는 내가 동궁 시절에 타던 것이다."라고 했는데 영조가 30살 어른이 되어 탔던 가마가 12살 어린 사도세자에게 좁았다는 것이다. 다만 어진 등으로 볼 때 영조는 체격이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사도세자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무술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면 단순한 비만이라기보다 살집과 근육량이 동시에 많은 [[근육돼지|장사 체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사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함경도에서 말타고 활쏘던 군인 집안 출신이라서 신장이나 골격이 거대한 편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의 아들들인 정종이나 태종을 필두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종과 문종도 풍채가 상당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도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니 사도세자가 이런 체형인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이렇게 보면 영조의 말은 엄살일 가능성이 높다.] * 다만 외모 자체는 미인이었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남]]이었다고도 한다. [[영조]]도 젊었을 적엔 꽃미남과였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부모 양쪽에서 미모를 물려받은 셈이다. 사도세자가 14세의 나이로 처음 [[대리청정]]을 하던 날 대신들이 사도세자의 위엄 있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라는 기록도 있다. 큰 체격에서 풍기는 압도감, 예비 왕의 첫 등장에 대한 립서비스도 있겠으나 바로 위의 동복누나 [[화협옹주]]도 어머니를 닮아 미색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화협옹주도 남동생과 비슷하게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 의외로 영조는 손자들인 [[의소세손]]과 [[정조(조선)|정조]]를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다. 의소세손은 영조가 무척 아끼던 딸 [[화평옹주]]의 3년상 끝무렵에 태어났는데[* 즉 상중에 왕세자 내외가 [[성관계]]를 했다는 트집이다.] 초산이었던 [[혜경궁 홍씨]]를 간호하던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에게마저 "죽은 딸을 잊고 손자가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다가 의소세손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예뻐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도 첫 아들을 본 기쁨도 잠시, 자기 신세를 예감했는지 "나 하나도 힘든데 아이까지 낳았으니 어찌하냐"고 중얼거려 혜경궁이 슬퍼했다. 마찬가지로 영조는 정조에 대해서도 '의소세손이 죽던 때에 잉태된 아이'라며 별 관심도 없더니 정조가 나중에 영특함을 드러낸 뒤에야 아끼기 시작했다. *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중대한 이유 중 하나가 [[https://www.youtube.com/watch?v=L7TREO8A5fE&t=1h53m18s|영조의 건강 때문]]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영조는 나이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건강했는데 사도세자가 30살을 넘길 경우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만 했지만 영조가 워낙 건강하고 팔팔하다 보니 자신이 계속 왕을 해야 했고 그 걸림돌이 사도세자였던 탓에 사도세자를 죽게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마디로 [[유봉|사도세자가 살아있으면 왕권이 약화되기 때문]]에 죽였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 중 하나가 영조에서 사도세자를 건너 뛰고 바로 [[정조(조선)|정조]]로 넘어갈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 생전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평양]]에 갔을 때 당시에도 유명한 화가인 [[변상벽]][* [[고양이]]나 [[닭]] 그림을 대단히 잘 그려서 당대엔 '변 고양이', '변 닭'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묘작도>란 그림이 유명하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다. 이 그림은 사도세자 생전에는 받지 못했다가 그림을 그린 지 10년 후에야 [[정조(조선)|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받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초상화는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 * 생전의 세자시강원에서 활동하며 사도세자를 교육했던 이천보(李天輔), 이후, 민백상(閔百祥)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의 행적이 수상하다. 당대의 기록인 [[영조실록]]에서는 이들이 단순 병사, 자연사했다고만 나온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01005_003|이천보의 졸기]] 그런데 후대의 [[고종실록]]에선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11019_003|이들에게 시호를 추증하면서 세 사람이 임오화변에 죄책감을 가지고 신사년(1761년)에 동반자살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도(영화)|사도]]에서는 고종실록의 주장을 채택하여 이천보가 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대한제국]] 추존황제 중 유일하게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인물이다. 나머지 추존황제들은 모두 대한제국 수립 이전에 왕으로 재위하거나 추존되어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는데 장조는 대한제국 수립 후에야 비로소 추존이 이루어져서 추존 후에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 [[디시인사이드]]의 다이어트 갤러리에 [[https://kstarhumor.tistory.com/2369|사도세자 다이어트]]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학대당했을 때 [[독일|지구 반대편]]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어느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태자]]가 비슷하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왕]]에게 학대당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프리드리히 2세 모두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한 나라의 왕위계승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사도세자는 유학적 소양, 프리드리히 2세는 군재.] 각자의 부왕이 너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면서 이들을 학대했다. 아버지가 명군인 점도 덤이다.[* 영조는 재위 말엽에는 별다른 업적이 없지만 초중엽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타국에서 비웃을 정도의 극단적인 검약으로 재정을 마련해 이 재정으로 프로이센군을 양성했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와 2차례의 전쟁을 하여 프로이센을 키운 것도 아버지 대에 만든 기반이 한 몫을 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2세는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폭주를 말려줄 사람들이 많았던 데다 부왕이 일찍 죽어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말려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진 상태에서 부왕 영조의 학대를 그대로 감당하다가 미쳐서 비행을 저지르고 결국 죽게 되었다. 가족들 사이에서의 인망은 영조 쪽이 더 나은데 영조는 자식들을 편애했다. 그 말은 좋아하는 자식은 좋아했고 다른 가족도 그래서 어찌야 되었든 영조가 죽었다는 말이 좋아했다는 가족은 없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가족들을 나쁜 의미로 평등하게 대해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유독 독하게 다뤘을 뿐이지[* 사실 사도세자가 당한 것은 가벼워 보일 정도로 독하게 다뤘는데 어느 정도냐면 사도세자는 자기가 관심 분야가 아버지가 기대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박을 심하게 당한 것이라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별 이유 없이 얻어맞았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버지로부터 어떻게든 안 맞으려고 아버지가 요구하는 군사 분야의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도 얻어맞았다.] 자기 자식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종, 시녀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그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도 걸핏하면 얻어맞았고 백성들도 조금만 빈둥대는 모습이 들키면 얻어맞았다. 이러다 보니 그가 죽자 '''가족들이 엄청나게 좋아했고''' 딸은 얼마 뒤 아버지가 죽은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으며 백성들과 신하들도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길 거부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에 묻혀서 알기 어렵겠지만 '''그 앞에 2명의 자식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문에 죽었다.'''[* 장남은 세례식에서 굳이 왕관을 씌우고 해야 한다고 아득바득 우겨서 억지로 왕관을 씌웠다가 그만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우려면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우겨서 '''갓난아기'''인 애 앞에서 대포를 쐈다가 애가 경기를 일으켜서 사망.] 자식을 대하는 수준은 어떻게 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쪽이 한 수 더 악질이다. *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궁녀]] 임씨(사후 [[숙빈 임씨]])가 [[은언군]]을 [[임신]]하자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그녀를 [[낙태]]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이 때 세자가 얼마나 안면몰수로 대했는지 사도세자의 정궁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불쌍하여 [[출산]] 때까지 돌봐주었다. 혜경궁 입장에서는 남편의 [[첩]]인 임씨가 질투는 고사하고 [[피해자]]로 보일 지경이었던 모양이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1달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혜경궁까지 "너무 투기를 안 해도[* 조선은 [[유교]] [[국가]]여서 질투가 심한 부인을 내치는게 당연시([[칠거지악]] 중 하나)됐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하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불충한 부인'이라면서 나쁘게 보기도 했다. [[중종(조선)|중종]]의 서녀 [[효정옹주]]도 아버지에게 "부녀자로서의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고 탄식에 가까운 질책을 듣기도 했다. 그야말로 [[어쩌라고]].] 여자가 아니다"라며 꾸중했다. 며느리를 아껴서 사도세자 사후에도 궁에서 살게 했던 영조가 혜경궁 홍씨를 혼냈던 것은 이 때가 유일하다고 한다.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궁녀]]에게서 자식이나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숙빈 임씨는 낙태를 당할 뻔하고 이후로도 직첩을 내려주지 않아 매우 어렵게 지내고 경빈 박씨는 처음엔 총애를 받았지만 나중에 광증(狂症)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를 말리려다가 (혹은 [[의대증]]을 보이던 그에게 옷을 갈아입히려다) 사도세자에게 [[살해]]당했다. 이전에도 후궁과 나인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 후 겁탈하고 어린 [[은전군]]을 연못에 던져 죽이려 한 걸 나인들과 신하들이 간신히 구한 바가 있다. 결론을 내리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과 그 자식들을 전혀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핍박으로 오히려 [[후궁]]을 두었음을 들킬까 두려워했고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영조까지 사도세자의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싫어하니 사도세자의 정비인 [[혜경궁 홍씨]]조차 남편의 여인들을 동정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혜경궁 본인도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실명할 뻔했다고 하며 남편의 비행을 [[영빈 이씨]]에게만 상의하며 매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도세자의 이복[[매형]] 김한신도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를 맞고 앓다 죽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런식으로 선대의 대표적인 폐세자 [[양녕대군]] 뺨치는 행각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비행과 살인행각을 아는 이들은 사도의 정신병과 비행이 영조의 학대로부터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폐세자는 당연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만약 영조가 이때 사도세자보다 조금만 더 일찍 죽어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연산군]] 뺨치는 조선 최악의 폭군이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 영조는 즉위 24년(1748년)에 심한 현기증과 입안 염증으로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고갈되어 위독한 상황을 맞았으나 사도세자가 궐 밖에서 구해온 [[고추장]]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다. * 동복 동생인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을 땐 좋고 나쁠 땐 굉장히 나빴던 것 같으며 오히려 그만큼 사도세자가 감정적으로 온기를 기대하며 의지했기 때문에 한 번씩 섭섭하게 굴 때마다 가감없이 솔직한 화를 터트리던 상대라고 볼 수도 있다. 한 예로 한중록을 보면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두 사람이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예 냉랭한 사이였다면 이럴 가능성은 없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고 하기엔 복잡한 형태다. [[분류:사도세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