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영조|아버지]]의 [[아동 학대]] === 아버지 [[영조]]의 사도세자를 향한 본격적인 [[아동 학대]]는 대략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살 때이다. 세자가 12살 때 까지는 [[영조]] 자신이 학구열이 높고 공부벌레로 유명해 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 세자가 아픈 구석이 있어도 [[영조]]는 끄떡 안하고 지나치게 공부를 시키면서 비록 엄하게 교육을 시키고 질책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칭찬도 많이 하고 세자를 매우매우 아꼈다.[* 하루는 10세인 세자가 글 읽기를 좋아한다며 좋아했고 세자가 지은 시를 보고 칭찬도 하고 신하들에게 자랑하는 일도 있었으며 12살 때 궁중 잔치에서 영조와 화목하게 시간을 보내는 등 이때까지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좋았다. ] 그러나 세자가 13살~ 14살 때부터는 영조가 애정을 주지 않고 세자를 혹독하게 대하며 엄한 질책을 하는 일이 잦아지고 칭찬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아동 학대]] 빌드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세자가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살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동 학대]]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게 큰 문제인데 영조 이전의 왕들도 자식을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 수많은 숙청을 일삼고 호랑이 같은 성격의 [[태종(조선)|태종]]도 '''조선사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역대급 문제아'''였던 [[양녕대군]]의 수많은 비행을 묵인하고 물고 빠는 아들바보였고 극악무도한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도 실록 [[연산군일기]]의 내용으로만 보면 자식들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아버지였으며 [[중종(조선)|중종]] 또한 자식들이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면 몸을 씻고 버선발로 뛰쳐나가 기쁨에 겨워 눈물로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팔불출 아버지였다. 심지어 중종은 훗날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 가능성이 큰 연산군의 장남 [[폐세자 이고]]를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려고 했다. 물론 신하들의 강한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이고를 비롯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장례만이라도 제대로 치뤄주라고 당부한 걸 보면 조카들의 죽음에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종은 비단 연산군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휘신공주]]를 비롯한 연산군의 딸들도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엄격하게만 키우다 보니 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만나기 무서워하였고 영조 24년(1748년) 심지어 [[날씨]]가 흐린 것을 두고도 [[영조]]는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꾸짖었기 때문에 세자는 궁인에게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라고 물으며 걱정해야 했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14살이였다.] [[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사도세자와 함께 자기 위해 [[창경궁 저승전|저승전]]에 자주 머물렀으나 [[경종(조선)|경종]]을 모시던 취선당의 내인들이 [[영조]]와 [[영빈 이씨]]에게 무례하게 굴어 불쾌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자가 7살이 되던 해에 [[유모]]인 한 상궁을 드디어 쫓아냈다고 하는데 세자의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주 양육자가 바뀌었으니 이것도 [[아동 학대]]다. "궁녀가 보기 싫으면 거기 있는 궁녀들을 쫓아내고 당신께서 가르치시지, 왜 사도세자를 [[경종(조선)|경종]]의 내인들과 지내게 하고 미워하셨는가"라는 혜경궁의 원망은 덤.[* 물론 선왕인 경종의 내인들이었던 만큼 영조 입장에서는 내쫓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영조]]의 정서적 [[아동 학대|학대]]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정성왕후]] 서씨가 병환이 깊어지자 병수발을 직접 들러온 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그릇을 붙들고 통곡하던 와중에도 [[영조]]가 온 것을 보자마자 울음이 뚝 그치고 겁에 질려 방 한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었을 정도다. 지속적으로 [[아동 학대]]에 노출되어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버지 앞에서는 아는 것도 우물쭈물해서 잘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더 실망해 매우 거친 질책과 비난만 자주 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세자는 대답을 우물쭈물 잘 못하고 그런 모습을 아버지는 정녕 이해하거나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고 갈구기만 하니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특히 사도세자는 이미 일찍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우울증 증상 중에 이해력과 기억력 감퇴도 있다. 이런 엄격한 막장 훈육까지 학문과 서연에 대한 흥미, 관심, 의욕을 크게 저하시켰을 것이다. [[영조|아버지]]가 질문해서 자신의 생각을 답했는데 아버지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니... 영조가 세자를 늦게 본 것도 조급증에 한몫 했을 것이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격무(激務)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 힘들었고 평균 사망 나이가 47.1세였는데 영조는 세자를 보았을 때 '''이미 42세였다.''' 선대 왕들을 보면 영조는 이미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 [[숙종(조선)|숙종]]이 좀 오래 살아서 그렇지, 왕이었던 형 [[경종(조선)|경종]]과 할아버지 [[현종(조선)|현종]]은 30대, 증조부 [[효종(조선)|효종]]과 어머니 [[숙빈 최씨]]도 40대에 죽었다.] 영조 입장에선 죽기 전에 최대한 세자를 준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영조가 결과적으로는 매우 장수(83세)했고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은 세자가 아들을 낳아 세손(뒷날의 [[정조(조선)|정조]])을 보고도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영조]]에 대한 애정이 싹틀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세자는 정말 건강이 나쁘긴 했지만 이를 핑계로 영조와의 진현(進見)[* 왕세자가 국왕을 직접 만나 문안인사를 드리는 행사.]을 계속해서 거르게 되었다. 왕의 불효가 쿠데타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조선/왕사|왕실]]에서 [[왕세자]]가 그리한 것은 큰 문제이다. 실제로 영조가 "왕세자가 진현을 몇 달째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자 당시 좌의정인 김상로가 "신(臣)들이 밖에 있어서 이러한 줄을 몰랐습니다.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1757년]] [[음력|음]][[11월 8일]] 병신 6번째 기사)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나 극명히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영조]]는 아예 많은 신하들 앞에서 어린 사도세자를 세워 놓고는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화를 내고 흉을 보며 "이게 다 세자 때문이다"라고 망신주길 자주 했는데 저렇게 한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꾸중하고 이렇게 한 일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고 크게 꾸중하였다. '''[[이게 다 XXX 때문이다|심지어 비가 와도, 천둥이 쳐도, 가뭄이 들어도, 한재(寒災)가 나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였다.]]''' [[1742년]] [[9월 19일]]자 [[승정원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8세의 세자 앞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세자가 책을 다 읽고 영조에게 달려와 "간신히 한 권을 다 읽었어요"라고 말한다. 당시 동몽선습은 조선에서 [[천자문]]을 다 읽고 시작하는 아동용 교과서인데 간신히 읽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1744년]] 영조는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라고 묻는다. 세자는 선뜻 대답을 못하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영조는 "네가 진실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필사적이라고 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신하들도 압도하곤 했던 [[영조]]의 속마음은 이런 세자의 성격과 학문 성취의 미흡함이 당연히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사실 어린 시절 사도세자의 특기와 성격은 전형적인 [[조선]] 중~후기 왕들과 다를 뿐 객관적으로는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전혀 문제가 없다. 특히 사도세자는 그 좋은 특기와 문제가 없는 성격이 기본적인 천성이었다. 부드럽고 유약한 성격은 [[영조]]의 할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증조부인 [[현종(조선)|현종]]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해 주지 않고 무조건 자기 방식에만 맞추라고 고집 및 강요하는 [[영조]]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억울하게 개고생을 해야 했다. [[조선]]의 세자 교육이 혹독했다고 해도 엄연히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교육과정도 국왕이 명망 있는 문신들을 서연관(書筵官)[* 세자를 직접 가르치는 스승. 정승급 중에서 명망이 있는 신하가 임명된다.]으로 임명한 뒤 그들에게 믿고 맡기며 틈틈이 세자와 스승들을 불러 점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전례도 없이 이런 단계를 싸그리 무시하고 세자에게 무리하고 혹독한 [[조기교육]]을 시키며 교육과정에도 과도하게 개입하고 간섭했다. [[1743년]] 9월경부터 9세인 세자는 "눈에 어지럼증([[눈병]])이 생겼다"고 스승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스승들은 영조에게 "세자 저하를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십시오"라고 영조에게 말하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스승들이 재차 충고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승정원일기]] [[1743년]] [[음력|음]][[11월 10일]]과 [[음력|음]][[11월 14일]]의 기록이다. 아들이 진짜로 병이 나서 치료해야 하고 스승들도 걱정하는데 [[영조]]는 오히려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들의 조언을 무시한 영조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했고 [[논어]](論語)를 읽게 한 후에 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글을 내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영조 23년 11월 11일 영조가 세자와 주강을 같이 행하다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영조]]: ''' [[한나라]]의 어느 제왕(帝王)이 우수하다고 여기느냐? >'''세자: ''' [[문제(전한)|문제(文帝)]]입니다. >'''영조: ''' 너는 어째서 [[고제(전한)|고조(高祖)]]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 문제와 [[경제(전한)|경제(敬帝)]]의 [[문경지치|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조: ''' 너의 기질로는 필시 [[무제(전한)|무제(武帝)]]를 좋아할 것인데, [[답정너|도리어 문제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자: ''' 무제는 비록 쾌활(快活)하지만, 오히려 오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주의가 부족하다'라는 뜻]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조: ''' 어떤 일이 오활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 [[https://ko.wikipedia.org/wiki/급암|급암]](級岩)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 그것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자: '''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고 주었으니 자못 [[고제(전한)|고조]]의 활달한 기상(氣像)이 있습니다. >'''영조: ''' 네가 만약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심하다. 어리석은 말이다. 비록 강직함을 포용하였으나 역시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중서]]는 [[강도]]에서 늙어갔고, 급암은 [[회양]]으로 내쳐졌던 것이니 진실로 개연한 일이다.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니, 너는 이러한 것에 더 힘써라! 여기서 나오는 '급암'이라는 자는 [[무제(전한)|무제]]의 신하로, 왕에게 쓴소리, 즉 바른말 잘하는 신하였다. 한 번은 회의하다가 급암이 한무제에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한무제는 쌍욕만 하고 끝냈다고 한다. 급암의 돌직구에 기분이 상해서 욕은 했지만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문제]]는 급암을 중용하지도 않았고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암은 회양 태수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 일화를 두고 서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의 말을 "너무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가르친다. 말하자면 "돌직구 한번 던진 걸 넘어가 주는 게 영웅이냐? 폭군이 아니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 근데 중용(重用)하지는 않았잖아.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건,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해!"라고 질책한 것이다. 이때 세자는 (세는 나이) 13세, 현대의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러고도 [[영조]] [[1748년|24년]]([[1748년|1748]]) [[음력|음]][[5월 19일]] 소대(訴對)를 행하고 똑같은 내용을 또 물어본다. "[[무제(전한)|한무제]]하고 [[고제(전한)|한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고조가 나았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문제(전한)|한 문제]]와 한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또 화를 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한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습니다"라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고 꾸짖었다. 즉 말 같지도 않은 것을 [[답정너|트집 잡아 갈궜다]]는 소리다. 영조 23년 겨울에 있었던 소대에서부터 사도세자는 분명 '무제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에게 화만 내고 넘어가는 면모도 있었지만, 사리에 어둡고 곧지 않은 길을 택한 경우가 많아 문경지치가 무제의 정치보다 나았다'는 답안을 내놓았고 영조 24년 여름 소대에서도 같은 답을 내놓았다. 큰 문제가 없는 답이었는데도 영조는 '너는 말만 그리 하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느냐?'고 억지로 트집을 잡으며 질책한것이다.[* 만약 여기서 무제가 나았다는 말을 했다면 영조 23년 겨울 소대에서처럼 대놓고 성급한 놈이라는 불호령이 내렸을 것이다.] 갓 공부하려고 마음먹을 때 듣는 잔소리가 더 매섭고 듣기 싫은 법이니 세자의 처지가 딱 그러하였을 것이다. 다음은 [[영조실록]]에 실린 원문이다. >임금이 소대(訴對)를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한(漢)나라]] [[한고제|고조]](高祖)와 [[무제(전한)|무제]](武帝) 중 누가 더 훌륭한가?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고조의 기상이 훌륭합니다. 하였다. >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전한)|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전한)|경제]](景帝)의 [[문경지치|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독음은 '호소심산대풍취']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 이 사람은 후일 [[임오화변]] 시점에서 영빈의 밀고로 대처분을 감행하려는 영조에게 '어찌 후궁의 말만 듣고 세자를 해치려 하시느냐'며 세자를 변호했다.]이 말하기를, 기(氣)가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중(安重)합니다. 하였다.[* 즉 '저하께서 겉으론 거칠어 보이셔도 실제로는 신중하시다.'라고 세자를 변호하는 것이다.] > >임금이 말하기를,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는데, 춘방의 여러 신하들은 매양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적마다 성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서 원량으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함으로써 임금 노릇하는 방도를 알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이겠다. 하니, >이영복(李永福) 등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5월 19일 임인 2번째 기사 무엇보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한중록]]에서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영조는 꼼꼼히 살피고 재빠른 성품인데, 세자는 덕성은 거룩해도 과묵하고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말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서는 이 때의 일화를 두고 '영조가 자기 딴에는 꼼꼼하지 못한 세자가 정치판을 잘 다루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신중함을 가르치려 했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세자의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평소 묻는 말에도 즉시 대답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고 영조는 매번 갑갑하게 여겼다고 하지만 [[아동 학대|영유아기부터 학대받고 자란 사람]]이 그 주체 앞에서 기죽고 눈치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공부를 해도 야단 맞고, 안 해도 욕 먹고, 영조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면 생각과 말이 다르다며 혼나고, 솔직하게 말하면 임금 될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 따위냐 제대로 안하냐며 또 혼나서 갈굼만 받으니 공부를 더 싫어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세자와 영조가 이러한 갈등을 빚은 것은 영조가 정통성 문제로 신하들에게 오래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영조는 왕세제를 거쳐 즉위한 데다 어머니 [[숙빈 최씨]]마저 무수리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신분이 미천했고 오죽하면 '게장으로 이복형 [[경종(조선)|경종]]을 암살했다'는 항간의 소문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면 어머니가 비록 [[후궁]]일지언정 양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궁녀 출신이었고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니 오로지 아버지 영조뿐이고[* 품행에 문제가 있어 폐세자되거나 세자가 되지 못한 케이스도 있으나 이들은 다들 장성한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다른 논란을 부르지는 않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행실은 문제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후궁]] 소생이라는 문제도 같은 이유로 무마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투했다" 혹은 "열등감을 느꼈다", "편하게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