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세자 (문단 편집) === 장례 ===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일대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배봉산 일자락이다. ([[서울배봉초등학교]] 인근) 지번 주소는 [[휘경동]] 29-1번지로, 현재 이 자리에는 [[삼육보건대학교]]가 들어서있다. 실제로는 당시에도 [[한성부]] [[성저십리|소속이었다.]]]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고 [[잡초]]가 무성히 많았던 초라한 [[무덤]]이었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흉지(凶地)로 손꼽히던 곳[* 물이 차서 아들 [[정조(조선)|정조]]가 이장하기 전까지 사도세자의 시신이 썩지 못했다고도 한다.]이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에 만드는 것에 신하들이 반대한 것을''' 영조가 강행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묫자리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던 걸 생각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조 본인도 승하한 후 손자 정조에 의해서 자신의 증조부인 [[효종(조선)|효종]]의 파묘 자리였던 원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권내)에 안장되었다. 파묘는 민간에서도 기피하는 곳이다. 할아버지이자 왕이었던 만큼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정조가 얼마나 영조를 원망했는지 알 수 있다.]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굴되었는데 [[정조(조선)|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시|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묘지석 자체는 [[199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공개되었으며 묘지문의 제목은 '어제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御製誌文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라고 해서 '''영조 자신이 지은 것'''이다. 세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 세자가 읽을 책을 국왕 자신이 몸소 [[필사]](筆寫)했다는 점과 함께 놓고 보면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 御製誌文 > 어제지문 >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 > 思悼世子諱愃字允寬 臨御十一年歲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 卽暎嬪所誕也 > 生而穎悟 及其長也 文理亦通 其有朝鮮庶幾之望 嗚呼 不學聖人 反學太甲慾敗縱敗之事 嗚呼 訓諭自省編心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 > > 사도세자의 휘는 훤(愃)이요, 자는 윤관이라. 임어 11년 세차 을묘 정월 스무이튿날 탄생하니 곧 [[영빈 이씨|영빈]](暎嬪)이 낳은 바이라. > 나면서 영오(穎悟)하고 급기 자라니 문리(文理) 또한 꿰뚫어 그는 거의 조선의 바람이러니라. 아아, 성인(聖人)을 배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갑]](太甲)[* 중국 [[상나라]] [[탕왕]]의 손자로, 무도하다 하여 신하들에 의해 멀리 추방당했다가 뉘우친 뒤에 다시 복위되었다.]의 욕패함과 종패한 일을 배우도다. 아아, 자성편(自省編)과 심감(心鑑)을 훈유(訓兪)하나 제멋대로 언교(言敎)를 짓고 군소(群小)와 압닐(狎昵)하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니라. > > > 噫 自古無道之君 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其本生於豐豫 不能攝心 流於狂也 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 終至於萬古所無之事 使白首之父 作萬古所無之事乎 嗚呼 所惜者其姿 所歎者述編 嗚呼 是誰之愆 卽予不能敎導之致 於爾何有 嗚呼十三日之事 豈予樂爲 豈予樂爲 爾若早歸 豈有此諡 > > 아, 예로부터 무도(無道)한 임금이 얼마리오, 그러나 세자 때에 이와 같다는 이는 내 아직 미문(未聞)인 바이라, 그는 본디 넉넉하고 편안히 태어나나 능히 섭심(攝心)하지 못하니 미치광이(狂人)로 흐르더니라. 숙야로 태갑(太甲)의 후오(悔悟)를 바라는 바이나, '''마침내 만고에 없은 바의 [[임오화변|일]]에 이르러, [[영조|백수(白首)의 아비]]로 하여금 만고의 없은 바의 [[살인|일]]을 일으키게 하느뇨?''' 아아, 애석한 바는 그 자태요 한탄하는 바는 술편(述編)이라. 아아, 이는 뉘 허물인고 하니 곧 내 능히 교도(敎導)하지 못한 소치일지니 네게 무엇이 있으리오? '''아아, 열사흗날의 일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네 만약 일찍 돌아왔으면 어찌 이 시호가 있었으랴.''' > > > 講書院多日相守者 何爲宗社也 爲斯民也 思之及此 良欲無聞 逮至九日聞不諱之報 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至此不忍呼寫 歲玄黓敦牂月夏五閏而卽二十一日也 乃復舊號特賜諡曰 思悼 嗚呼 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此矣 此豈爲爾 嗚呼 辛丑血脈之敎 今只有世孫 寔爲宗國之意也 七月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 嗚呼 無他施惠賜嬪號曰 惠嬪於斯盡矣 此非詞臣代撰者 故臥而呼寫 表予三十年之義 嗚呼 思悼將此文而無憾于予矣 > > 강서원(康庶院)에서 여러 날 서로 지킴은 '''어찌 종사(宗社)를 위함이요, 이 백성을 위함이리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들음이 없고자 하였거늘, 아흐렛날에 이르러 꺼리지 못할 보고를 들었노라. '''네 무슨 마음으로 일흔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만나게 하느뇨.'''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여 불러 베끼노라. 해는 현익돈장(玄黓敦牂)[*임오(壬午)]이요 여름 윤5월하고 곧 스무하룻날이라. 이에 다시 옛 호(號)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특사(特賜)하며 가로되 '''사도(思悼)'''라 하노라. 아아, 서른 해에 가까운 아비의 은의(恩義)가 이에 펴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리오? 아아, 신축(辛丑)의 혈맥을 가르침이 '''지금은 다만 세손이 있으니 참으로 종국(宗國)을 위한 뜻이니라.'''[* 여기서 [[영조]]의 뜻과 함께 아들에 대한 약간의 변명도 드러난다. 처음에 자결을 종용(從用)한 것도 그렇고 정황상 영조는 처음부터 세자가 아니라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자의 존재는 부담이었고 세자는 영조의 눈밖에 나고 [[정조(조선)|세손]]이라는 차선책이 생기면서부터 이미 죽을 운명이었다. 영조는 이 글에서 세자의 죽음을 "예상치 못한 사고"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은 세자가 왜 죽어야 했는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세자에게 변명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영조]]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지만서도 세자가 비뚤어진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7월 스무사흗날 양주 [[중랑천|중랑포]] 유향(酉向)[*서쪽] 벌에 매장하노라. 아아, 다른 시혜(施惠) 없이 [[혜경궁 홍씨|빈]]에게 호를 내리며 가로되 [[혜경궁 홍씨|혜빈]](惠嬪)이라 하며 이에 다하노라. '''이는 신하가 갈음(喝吟)하여 지음(至吟)이 아니요 누워서 불러 베끼게 하여 내 서른 해의 의리를 나타내노라''', 아아, '''사도(思悼)는 장차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섭섭해 하지 말지어다.''' > > > 壬戌入學 癸亥行冠禮 甲子行嘉禮 娶豐山洪氏 卽領議政鳳漢之女 永安尉柱元五代孫 嬪誕二男二女 一懿昭世孫 一則世孫 嘉禮于淸風金氏 卽參判時默女 府院君五代孫也 長女淸衍郡主 次女淸璿郡主 側室亦有三男一女矣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日 > > 임술([[1742년|1742]])에 입학하고 계해([[1743년|1743]])에 관례를 행하고 갑자([[1744년|1744]])에 가례를 행하여 [[혜경궁 홍씨|풍산 홍씨]]를 아내로 하니 곧 영의정 [[홍봉한|봉한]]의 딸이요.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라. 빈(嬪)은 2남 2녀를 낳으니 하나는 [[의소세손]]이요 하나는 곧 [[정조(조선)|세손]]이라. 가례는 [[효의왕후|청풍 김씨 즉 참판 시묵의 딸]]과 하니, 부원군의 5대손이라. 장녀는 [[청연군주]]고 차녀는 [[청선군주]]라. 측실 또한 3남 1녀라. [[건륭제|숭정기원후]] 135년([[1762년|1762]]) 임오 칠월 일 > 이뿐만 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발인(發湮)에 손자인 정조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영조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정조(조선)|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만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마지막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날을 사관은 이렇게 비판한다. >"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영조|성상]](聖上)께서 한 번 곡(哭)하고 영결(英結)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情裏)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조 100권, 38년([[1762년]] 임오 / [[청나라|청]] [[건륭제|건륭]](乾隆) 27년) 7월 13일(계유) 1번째 기사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아무리 왕실 예법 때문이라고 해도 명색이 아들인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다니 정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도 세손인 어린 정조가 세손빈과 함께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찾아와 물을 건네려 하는데 영조가 이를 저지하려고 하자 "자식이 아비한테 물 한 잔도 드릴 수 없사옵니까!!!!!" 라며 절규하는 부분이 있다. 끝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그의 장례가 치러지자 유일한 적자였던 정조가 상복을 입고 상주를 지내며 발인에 참석하려고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이 흠이 될 것을 우려한 고모 [[화완옹주]]부터 어머니 [[혜경궁 홍씨]]까지 상복을 벗겨 영조에게로 보내려고 하자 이를 거부하며 오열하는 장면도 나온다.] 다만 이에 대해선 [[영조]]가 단순히 사도세자에게 잔혹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냉혹이 아닌) 냉철한 행동이란 해석도 있다. 일단 사도세자를 역도(逆道)라는 명분으로 죽인 상황에서 계속 세손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규정하고 방치했다가는 '역적의 아들 = 역적'이라는 [[연좌제]] 논리[* 逆敵之子 不位君王, 역적의 [[정조(조선)|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로 인해 세손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즉, 자칫하면 세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사후에도 영조가 그를 푸대접한 이유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형식상 사도세자와는 무관하게 만듦으로써 세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영조실록]]의 직접적인 기록에 의하면 영조 자신이 [[효장세자]]가 비록 사도세자에게 형(兄)의 지위에 있으나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만일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살아있었다면 [[효장세자]]는 세자위에서 (추존 형태라도) 왕이 되지 못한 [[순회세자]]나 [[소현세자]]의 예를 따르게 되었을 것이지만 [[임오화변]]으로 인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의 [[조선/왕사|장통]](長統)[* 장자 - 장손으로서의 계통]을 계승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의리상''' 불가피해졌다고 발언한 것이 나와 있다.[* [[영조실록]] 103권, 영조 40년 2월 20일 기사: 나라를 위해 진전에 아뢴 글] 물론 역시 세손의 인간적인 심정까지 완전히 헤아린 결정은 아니었다. 이와는 별개일 수도 있는데 [[임오화변]] 이후 [[영빈 이씨|영빈]]의 장례를 치를 때의 일이다. 이미 이전의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진종)의 [[조선/왕사|장통]](長統)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처분으로 인해 영빈 이씨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공적으로는 단순히 할아버지의 [[후궁]]으로서 지위(의붓할머니, 서조모)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영조 왈 "영빈이 죽었는데 장례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세손과 혜빈([[혜경궁 홍씨]])이 영빈 상(喪)에 임해야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는게 말이 되느냐?"며 예조판서 이지억을 파직시킨 후 세손 모자로 하여금 영빈의 발인날 곡림을 하게 했던 사례가 있었다.[*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9월 7일 병진 1번째 기사]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 시점은 사도세자의 사후여서 사도세자의 '적자'인(였던) 정조가 사도세자의 장례에 임했던 방식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최상급 장례용품을 사용하는 등 장례는 나름 정성을 들여서 제대로 치러 주었다. 이는 당시 예조판서 겸 호조판서 정홍순이 "최대한 예를 갖춰 장사지내라"고 어명으로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즉 영조의 지시는 아니었다.] 1777년 정조가 "장례 당시에 사용한 물품을 검열하겠다"고 하자 정홍순이 견본을 보냈고 정조는 아버지를 제대로 장사지내 준 것에 대해 감격하여 특별히 정홍순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7977&cid=46622&categoryId=46622|#]] [[정조(조선)|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가 영조 40년(1764년)에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짓는 등의 예우를 보인 다음에 정조에게 "네 아비에겐 할 만큼 했다. 단 한글자라도 더 높인다면 할아비를 잊은 것으로 알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정조가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즉위 직후의 연설에서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나를 [[효장세자]]의 뒤를 잇도록 하셨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러니 함부로 추숭(追崇)을 말하는 자는 마땅히 처벌하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 일화를 [[이덕일]]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일성해서 노론 대신들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전형적인 [[단장취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곧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을 높여 고쳐 부르고[* 영조가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궁으로 봉한 예를 따른 것. 왕의 생모의 사당을 궁으로 봉하듯이 생부의 사당을 궁으로 봉하는 예가 합당하고 애초에 이 제도를 만든 이가 영조였으니 한 글자도 높이지 말라는 영조의 엄명이 오히려 예에 어긋나는 상황이었고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덧붙여 생모인 사도세자빈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혜경궁으로 봉함으로써 이후 왕을 낳은 후궁은 생존 시에도 궁으로 칭하는 법도를 만든다. ]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렸는데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시|수원부]]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가 있었던 화산(花山 / 華山)[*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일대]으로 옮기고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켜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하였으며 기존 수원부 읍치와 시가지를 이전하기 위해 현재의 [[수원시]] 일대에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자주 이 화성으로 행차했다고 한다. 훗날 고종 때 임금으로 추존되면서 받은 능호는 [[융릉]](隆陵). 능의 양식을 보면 오히려 정조의 능인 건릉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이때는 문성국, [[숙의 문씨]], 김상로 등이 역률로 추죄된 후라서 오히려 신하들이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라고 안도하여 조용했다. 당시에는 아직 임금으로 추숭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세자묘인 '원'(園)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조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아버지 무덤을 정성껏 모신 것이다.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09082613360543242_1.jpg|width=100%]] 능상에서 바라본 [[융릉]](隆陵)의 전경.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정자각이 정면이 아니라 오른편에 비켜 세워졌는데 그 이유는 현륭원의 정자각을 지을 때 능상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어라고 정조가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정조는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야 죽은 뒤에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신하들은 통곡했다고 한다.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했다. 현륭원 자리를 정할 때 신하들이 한성에서 수원까지의 거리가 88리라서 임금이 원행을 나갈 때 80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정조는 "앞으로 수원을 80리로 정하노라" 라고 말해 자신의 성묘(誠墓)를 정당화시켰다. 이장한 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를 하러 갔다.[* [[정조실록]] 18년 1월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에게 "우리 전하가 현륭원에만 가면 대성 통곡을 하시고 애통해하시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너무 자주 가는통에 옥체 상할까 염려되니, 혜경궁께서 아드님 되시는 전하(정조)에게 제발 현륭원에 그만 가라고 말해 달라"는 호소를 연달아 할 정도였다.] 군주의 잦은 방문으로 인해 융릉을 관리하는 [[능참봉]][* 다만 '원'의 관리인은 '능참봉'이 아니라 '수봉관'이라는 명칭이 별도로 있다.]들이 고생했다거나 심지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능참봉 항목 참고. 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현륭원이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遲遲臺. '매우 더디다'라는 뜻으로 지지부진할 때의 그 지지다.]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하며 나중에는 다른 길을 만들어 일부러 피해갔다고 한다. 야사 중에는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나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는데 이후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당태종]]에게도 비슷한 야사가 있다. [[메뚜기]]들이 전국의 농작물을 갉아먹자 메뚜기 1마리를 잡아서 '이 망할 놈들이 내 백성들을 괴롭히느냐! 죄가 있다면 내게 있으니 내 오장육부나 대신 먹어라!'라고 메뚜기를 씹어 삼키자 전국의 [[메뚜기]]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태종(조선)|조선 태종]]에게도 동일한 메뚜기 설화가 있다.] 이후 백성들이 흉년으로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상황이 벌어지자 정조는 처벌 대신 콩주머니를 나무마다 매달게 하여 나무껍질 대신 먹도록 한 일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