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천 (문단 편집) == 생애 ==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나라의 전성기 때 용문[* 현재 [[섬서성]] 한성시에 해당한다. 춘추시대에는 소량, 전국시대에는 하양이라고 불렸다.]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 겸 [[국가기록원]]장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이었다. 태사공서(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 성격도 있다.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 때부터 긴 시간 동안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데 썼다고 한다. 사마천은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하나라)|우왕]]의 동굴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설·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 황실의 [[봉선|봉선례]]를 거행했다. 사마담은 태사령인 자신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했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에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고 이후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이다. 그 시초는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의 [[광무제]], [[송진종]] 등 [[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당태종]]도 "나 정도면 해도 되지 않느냐?" 하면서 봉선을 거행하려고 했으나, 역시나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신 [[위징]]이 "아직 천하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면서 극구 반대해서 결국 포기한다.],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하다.[* 다만 사마담만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봉선에 함께하지 못해서 한무제의 봉선에 참여한 이는 곽거병의 아들인 곽선뿐이다. 곽거병에 대한 한무제의 총애와 또 그에 걸맞는 곽거병의 활약을 감안해 보면 사마담 입장에서는 실의에 빠질 만하지만 한무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도중, 사마천은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마천은 이릉은 선전했지만 상황의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패전의 책임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가 져야 했으나,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다. 따라서 이릉에 대한 변호는 무제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 여겨진 것이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단순히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사마천의 변호는 무제의 미움을 샀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 다만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는 이릉의 건 이전부터 사마천이 무제에게 밉보였다고 서술했다. 사마천이 역사서인 경제본기에 [[한경제|경제]]와 무제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적었는데, 한무제가 나중에 이를 알고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버렸고, 이후 이릉의 건을 빌미 삼아 탄압했다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전한 황실은 사마천의 후예를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제는 옥에 갇힌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① 돈 50만 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② 사형,[* 신하들에게 잔혹한 형벌을 자주 내리던 무제의 성격상 죽기를 선택하면 사마천은 그냥 참수도 아니고 일부러 능력 없기로 소문난 [[망나니]]에게서 너무 자주 써서 상태가 좋지 않은 대도로 처형당하는 식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무제에게 처형된 신하들 중에서 혹형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무제는 혈육조차 참수했던 황제이다. 다만 사마천 본인은 애초에 이게 무서워서 궁형을 택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설령 진짜 무서워서 그랬다고 해도 쪽팔려서 말 못할테고~~] ③ [[궁형]][* 사실 거세가 핵심은 아니다. 죽으면 목숨을 잃어도 명예가 보존되지만--크으으으 남자다--, 궁형을 당하면 당장의 목숨은 건지되 인생은 완전히 끝장난다. 사실상 명예도 잃고 결국 목숨도 자살 혹은 감염증의 형태로 끝장나는 셀프 사형. 게다가 본인이 남긴 모든 업적이 부정당하기 때문에 대부분 전한대에 사형을 받으면 혹형이 기다려도 그냥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냥 사형받기 or 당장은 살지만 결국 모든 걸 잃고 몇 년도 가지 않아서 더 비참하게 죽기. 선택지는 뻔하다. 사마천처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업적을 세운다면 후세에는 업적을 남기기 위해 받을 수 밖에 없던 시련이었다고 여겨 치욕으로 취급받지 않겠지만 누구나 사마천과 같을 수는 없고 어쨌든 저 평도 죽어야 받는다.]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 5천 병력의 식비 + 피복비 + '''급여''' + 기타 잡비 등등을 다 합친 수준이다. 일반 사졸이라도 천 단위면 급여가 엄청날 터이다. 20명당 1명꼴로 [[소위]]가 있고, 100명당 1명꼴로 [[대위]]가 있으며, 200명당 1명꼴로 [[소령]]이 있고, 500명당 1명꼴로 [[중령]]이 있는 현대식 군대 체계로만 대입해도 여기서 몇 배는 더해진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고 당시에는 [[군마]] 즉 현대 기준으로 따지면 각종 전투용 [[기갑]] 부대의 구매 비용부터 유지 관리 비용도 다 포함하는데 이것만 대충 따져봐도 수십억에서 수백억은 넘어가는 돈이 계산된다. 일반인은커녕 금수저도 쉽게 낼 수 없는 돈이다.]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전한의 벼슬아치는 봉급을 많이 받지 못했다. [[고조선]] 멸망전에 참전한 전한의 장군 양복만 해도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참수당하는 대신 많은 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것도 순체와 공손수가 적극적으로 일을 개판으로 만든 게 인정되어서 양복이 내야 할 금전의 액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었다. 만일 반대 상황이었다면 양복은 낼 돈도 없어서 사형당했으리라는 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양복은 순체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출전했다가 졌다고 벌받았고, 순체, 공손수, 위산은 공을 시기하여 서로 다퉜다고 벌받았는데, 왕검성 전투를 보면 확실히 양복보다는 순체, 공손수가 저지른 병크가 더 큰지라 양복이 이들보다는 낮게 처벌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서도 양복보다는 순체가 더 문제아라고 보았는지 순체를 두고 '성질이 사납다.', '작은 싸움에서 이긴 걸 두고 교만해졌다.' 등으로 나쁘게 기술하였다.]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성불구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毁不用矣!)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궁형을 받음으로써 사마천은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나마 죄를 지어 받은 게 아니라 황제에게 억울한 [[누명]]으로 미움을 받아 궁형을 받은지라 가족들과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감염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는 행운(?)까지 누렸다지만 대신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도 멀리했다고 하고[* 고환만 잘라서 생존율(?)도 높고 요도와 연결되는 [[음경]]은 건드리지 않는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음경과 고환을 통째로 도려냈다. 이때 임시로 요도를 만들긴 했으나 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돼 막 거세된 신참 환관들은 소변을 눌 때 조절을 못해 줄줄 흘리거나 뭍히기도 했으며 요실금처럼 소변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항상 오줌 지린내가 나서 고참 환관이 이를 빌미삼아 신참 환관들을 갈구곤 했다.] 보임안서에서는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린다(장일일이구회 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게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 사람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 청년 시절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었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임안은 관직이 익주자사(益州刺史)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안 역시 불행해졌다. 기원전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모함한 관리는 북군의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임안이 그를 매질하고 모욕을 주어 원한을 품었다.) 한무제는 일단 삘이 오면 무조건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임안은 반역을 하지 않았는데도 처형되는 것이 억울하다며 친구인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임안은 반역의 누명을 쓰고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져 죽었다. --친구끼리 한무제한테 쌍으로 못볼 꼴을 당하고 말았다--]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있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 무제는 신하들에 대한 대우가 심하게 무원칙적이었다.]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실 신임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중서령은 당나라 때부터는 엄연한 재상직이었지만 중서령이 재상직으로 격상된 것은 [[조비|위문제]] 때부터였다. 전한의 중서령은 황제의 서간 등을 관리하던 벼슬로, 당시에는 지위만 높았지 사실상 환관이나 맡는 자리였다. 즉 한무제가 그를 중서령에 앉힘은 사실상 환관 취급했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다. 이를 '보임안서'(報任安書)[* 임안의 자인 소경을 따서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 불리기도 한다.]라고 한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던 익주자사 출신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대충 취지를 정리하면 [[한무제]]는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데 도가 튼 위인이니 나중에 무고가 입증되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임안에게 일단 살아서 견디고 재기를 노리라고 조언한 것인데, 편지가 보내졌을 때는 안타깝게도 임안이 궁형을 받기를 거부하였고 한무제도 임안이 자신을 속이려 하고 불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처형을 지시하여 결국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전략) >"죽음은 단 한 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서주|주나라]] [[주문왕|서백]]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전국시대)|이사]]는 [[진(통일왕조)|진]]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주발(전한)|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역사책)|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손빈병법|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빈|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 >출처: [[한서]] 62권 사마천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어이없었다.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가 무제의 애첩 이부인의 오빠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또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했다.[* 위청은 한 무제의 처남이고, 곽거병은 처조카라 한무제와는 인척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광 못지 않은 명장이긴 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했다. 이런 일로 궁형을 당해야 했던 사마천은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흉노와 싸우러 출진하던 도중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 이광리의 외조카인 창읍왕 유박(劉髆)을 황태자로 올리려고 승상 유굴리(劉屈氂)와 작당했으나 내자령 곽양(郭穰)이 무제에게 이것을 고발하면서 들통난 것. 유굴리는 요참형을 당하고 일족들도 다 죽었으며 이광리의 처도 하옥되었다. 창읍왕 유박은 당시 사정을 몰랐다는 이유로 무사했다.]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쟁 자체는 계속 이겨나갔으나 무리하게 병사들을 이끌어서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은 진압했으나 직후 흉노에 참패한 후 망명해버렸다.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제후의 [[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는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위율과 함께 선우한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 거라고 꼬드겼기 때문……. 그래도 나중에는 [[한무제]]가 이 일을 후회했는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처벌하라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버리고(…)[* 사마천을 그런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무제 본인이며 게다가 사마천의 처벌에 옹호했던 사람들은 사마천이나 이릉이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무제에게 잘 보일려고 아부한 것이다.]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고환|그까짓 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한무제 자체가 능력과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뻔뻔하며 일 저지른 뒷수습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인간이긴 했다. 그나마 궁형까지 가했음은 진짜 미안했는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사람 인생을 그 꼴로 만들어놓고 사과한다고 수습될 리 없다. 게다가 지인까지 억울하게 처형당했으니. --싫은 티 내고 싶어도 황제인지라 낼 수도 없는 노릇--]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