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천 (문단 편집) == 기타 == * 사마천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사기》와 <보임안서> 외에도 몇 편이 더 남아 있는데[* 다만 사마천의 문장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논쟁이 다소 있다고 한다.]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여덟 편의 산문과 《사마천집》 한 권, 《소왕묘론》 두 권이 더 있다고 한다. 다만,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두 편의 산문[* 지준에게 보낸 편지인 <여지준서>와 그에 대한 답장이 한 편, 때를 잘못 만난 선비를 슬퍼하는 글이란 뜻의 <비사불우부> 한 편, 이렇게 두 편이 남아 있다고 한다.]과 《소왕묘론》 일부만이 다른 책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출처: 김영수 저,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권 278p, 279p]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 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 건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잃어버리고 자칫 목숨까지 같이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특히 사마천은 궁형으로 인해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태사공서(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와 고통을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돈을 내고 형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사마천은 경제적인 면을 주로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유전무죄 무전유죄|돈만 많으면 --고자도 되지 않고-- 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 가급적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식의 서술을 써놓는다. * 사료 문제로 [[http://orumi.egloos.com/4866494|공자의 견해에 대놓고 반대하기도 했다]]. --유학자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 사마천 그 자신은 유학을 배웠음에도 유학자들과는 견해가 다른지 가령 여후를 다룬 기록을 본기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잘 보면 유학자들하고 꽤나 차이가 난다. 대표적인 게 [[오운]]인데 유학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오자서가 자신의 군주였던 자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안 좋게 평하나 사마천은 반대로 한때의 치욕을 참고 결국 대업을 이루어낸 인물로 평가한다. 본인도 비슷한 처지인 만큼 동병상련인 모양] 이글루스가 닫힐 예정이라 원문을 쓰면, 두가지 일화를 논하는 블로그 글이었다. 하나는 백이 숙제의 건인데, 공자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乎 ]고 기술하였으나 사마천은 시를 인용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하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요임금과 허유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유교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 고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 전한 경조윤(京兆尹) 화음현(華陰縣) 사람. 자는 자유(子幼)고,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이다. 《사기》(史記)를 익혀 세상에 널리 전파했다. 선제(宣帝) 때 좌조(左曹)에 임명되어 곽씨(霍氏)의 음모를 고발해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졌고, 중랑장(中郞長)이 되었다. 신작(神爵) 원년(기원전 61)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하여 재물을 경시하고 의로움을 좋아했다. 그러나 각박하고 남의 나쁜 비밀 등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원한을 많이 샀다. [[태복]]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나빴는데, 장악이 고발당하자 그가 시킨 것으로 잘못 알아 평소 언어가 불경하다고 상소를 올림으로써 면직당해 서인(庶人)이 되었다. 직위를 잃고 집에서 일하며 집안을 일으켜 그 재산으로 생애를 즐겼다.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충고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에 원망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선제(宣帝)가 이것을 읽고 미워한 데다가 참소와 중상모략을 당해 대역 무도죄로 [[요참형]](腰斬刑)을 당했다. --왜이리 주변에 요참형당한 사람이 많을까...--]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근데 [[신나라]]가 15년 만에 망했다.~~ * 남성기를 잃은 공통점으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고 사마천 본인이 환관인 건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의 시조. * 그의 이름을 딴 [[별]]도 있다. '''[[소행성]] 12620 쓰마첸(Simaqian)'''은 바로 사마천의 중국어식 발음에서 이름을 따왔다.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사마천 (司馬遷)[* 박경리,《못떠나는 배》(1988, 지식산업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궁형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고자|자식이 없는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고증오류|사마천은 처벌을 받았을 당시에 자식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후손이 남아있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남자를 위하여》(1996, 민음사).]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필명(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을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로 만든 이유도 '자신은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한자를 풀이하면 시바는 사마, 료타로는 요태랑, 직역한즉 '먼 장남'이다. 말 그대로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의미다.] * 사마천 사후, 등장한 서진 고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천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 왕실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직장인'''의 관계-'''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로 볼 수 있다. * 《[[사기(역사책)|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역사)|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한편 '''진(秦)나라로 간 사마씨''' 중에 '''[[사마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진 [[혜문왕]]에게 촉을 정벌할 것을 고하였고, 이에 사마착이 촉을 정벌하여 진왕으로부터 촉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대전]]에서 조나라를 대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백기(전국시대)|백기]]가 숙청될 때 두우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다.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상업 지역을 담당하던 관리)이 되었고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태사공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이 '''사마담의 아들'''이었다. * 한편 '''조(趙)나라로 들어간 사마씨의 후손'''인 '''[[사마앙]]'''은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조왕 무신 휘하의 [[장이]]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함락했는데 항우에 의해 '''은왕'''으로 봉해졌고, 한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하내군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이 사마앙의 11대손'''이 경조윤 '''[[사마방]]'''이었으며, 방의 [[차남]]이 '''[[사마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 → '''[[진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착''' → '''사마근''' (착의 손자) → '''사마창''' (근의 손자) → '''사마무택''' (창의 아들) → '''사마희''' (무택의 아들) → '''[[사마담]]''' (희의 아들) → '''사마천''' (담의 아들) >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 → '''[[조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앙''' → '''[[사마방]]''' (앙의 11대손) → '''사마의''' (방의 아들) * [[한중 FTA]] 체결 기념으로 사마천의 고향 산시성 한청시에서 제작의뢰하여 사마천의 일대기를 다룬 [[오페라]] [[https://youtu.be/VSl7djMO9jE|<사마천>]]이 2016년 뉴서울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초연되었다. * [[심영물]] 제작자 [[차커]]가 사마천이 [[궁형]]을 [[내가 고자라니|당한 뒤]] [[사기(역사책)|사기]]를 저술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심영물로 제작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ErM97Yo7FE|사마천이 된 심영]] 대응되는 인물은 야인시대 김두한 - 한무제, 심영 - 사마천, 이정재 - 임안, 김좌진 - 사마담이다. 심영물 장르 특성상 한무제는 [[사디스트|낭심자르는걸 즐기는 특이취향]]에 김두한의 아버지인 김좌진이 여기선 심영의 아버지인 걸로 치자며 권총을 들이대는 괴짜로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